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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탄생

대한민국의 최전선에서 거센 물살을 마중한 도시 유승훈 | 생각의힘 | 2020년 11월

부산의 탄생

■ 책 소개역경의 파도를 넘어, 웅숭깊은 역사를 품은 도시 ‘부산’의 탄생 한반도 동남쪽 끝에 위치한 부산은 어떻게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무역항이 되었을까? 부산의 위상은 어느 날 갑자기, 운 좋게, 어쩌다 보니 높아진 것이 아니다. 부산의 지리적 특성과 퇴적된 시간,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역사가 모여 지금의 부산이 만들어졌다.부산(釜山)은 안으로는 누룽지를 끓이고 밖으로는 방을 덥힌 가마솥처럼 역사의 중대한 순간마다 외부의 뜨거운 변화와 아픔을 끌어안고 더운 숨을 뱉었던 것이다.부산을 현대, 근대, 조선의 세 시기로 나누어 그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낸 이 책에는 부산이 겪어온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부산에 대한 애틋하고 짠하면서도 사무치는 감정들을 소환할 뿐만 아니라, 부산의 정치, 경제, 문화를 종횡무진하는 다채로운 이야기와 실감나는 사진들이 더해져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진짜’ 부산을 만날 수 있다.■ 저자 유승훈향토문화연구가이자 문화재연구가이다. ‘옛 우물에서 맑고 새로운 물을 긷는다(舊井新水)’라는 신념으로 우리 문화와 부산 역사를 알리는 글을 쓰고 있다.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후 민속학을 전공하여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를,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6년 전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박물관에서 낡은 유물을 살피거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2012년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을 펴내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부산 문화에 대하여 쓴 『부산은 넓다』는 부산의 10대 히트상품에 선정되었다. 지은 책으로는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부산』, 『조선 궁궐 저주 사건』, 『문화유산 일번지』, 『부산은 넓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민속』,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우리 놀이의 문화사』,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현장속의 문화재 정책』 등 다수가 있다.■ 차례서문1부 현대의 부산: 뜨거운 용광로의 탄생1장 대한민국의 막다른 최전선, 피란수도 부산1 「굳세어라 금순아」와 「경상도 아가씨」2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된 부산3 아, 힘들고 거친 피란살이 3년이여4 그래도, 피란지에서 희망을 찾다5 이승만 반공정권의 탄생6 「이별의 부산정거장」, 피란수도 부산은 무엇을 남겼나2장 뜨겁게 달궈진 ‘수출과 정치 용광로’의 탄생1 수출산업의 최전선, 부산2 민주주의 최전선과 대통령의 잉태2부 근대의 부산: 회색빛 관문도시의 탄생3장 외세 열기로 가득한 개항의 도가니1 근대 관문도시 부산2 조선을 삼킨 근대3 ‘부산항 그림지도’의 거류지4 ‘포산항견취도’에 나타난 변화상5 해관과 감리서6 푸른 눈의 이방인이 본 ‘Fusan’4장 근대 조선을 축소한 도시, 부산1 부산에 열린 근대의 관문2 달라진 부산, 근대의 시공간3 관광지로 전락한 동래4 일제에 맞서는 부산 사람3부 조선의 부산: 들끓는 가마솥의 탄생5장 조선의 가마솥이 된 부산1 조선시대 가마솥의 탄생2 『해동제국기』의 富山3 해두보海頭堡로 전락하다4 관방關防과 충렬의 최전선6장 가마솥 문화의 탄생1 흰 모래밭에서 탄생한 수영 문화2 춤추고 술 익는 고장, 동래3 조일 문화의 접경지대, 초량왜관주석 유승훈 | 생각의힘 | 2020년 11월 부산의 탄생 가마솥부터 용광로까지 대한민국 최전선 ‘부산’의 탄생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도시, 부산에는 항상 활기가 넘친다. 인구 약 340만의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은 그 탄생부터 현재까지 잠시도 쉰 적이 없다. 작은 한반도 끝에 자리한 항구도시 부산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개항기의 부산은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근대 문물의 거센 파도를 맞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까운 위치 탓에 부산에 터를 내린 일본인들 틈에서 설움을 견뎌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톱질하듯 밀고 당기는 전쟁통에 밥그릇만 겨우 챙겨 떠밀려 내려온 피란민들을 받아들이고 피란수도로 기능한 장소도 부산이었다. 부산(釜山)은 그 이름처럼 우리 대한민국의 가마솥이 되어 주었다. 가마솥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아주 특별한 도구였다. 뜨거운 장작불에 달궈진 가마솥은 그 안으로는 누룽지를 끓이고 밖으로는 방을 덥혔듯이, 부산 또한 역사의 중대한 순간마다 외부의 뜨거운 변화와 아픔을 끌어안고 더운 숨을 뱉었다. “굳세어라 부산아”, 부산은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 한반도 동남쪽 끝에 위치한 부산은 어떻게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무역항이 되었을까? 부산의 위상은 어느 날 갑자기, 운 좋게, 어쩌다 보니 높아진 것이 아니다. 부산의 지리적 특성과 퇴적된 시간,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역사가 모여 지금의 부산이 만들어졌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6·25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빗속을 뚫고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을 임시수도로 공포했다. 부산이 도합 3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다. 연구자들은 ‘임시수도’ 대신 ‘피란수도’라는 용어를 쓸 것을 제안했는데, ‘임시’라는 말에는 수도는 당연히 서울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시절 부산은 대한민국이 절벽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막다른 최전선’이었다. 비록 군사적 전선은 아니었지만 정치, 행정, 문화, 교육의 최전선이 부산에서 형성되었다. 부산에서 땀과 피를 흘린 결과로 전쟁은 종결되고, 서울로 환도할 수 있었다. 피란수도가 부산에 남기고 간 숙제는 너무 많았다. 작은 체구로 힘겹게 수십만의 피란민을 업은 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부산의 심정은 여러모로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중앙정부 부처 일부를 세종시로 분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서울 공화국이다. 웅숭깊고 무구한 역사를 듬뿍 품은 부산을 비롯한 지방의 역사를 단지 ‘일부의 역사’로 치부하며 뒷방 신세로 미뤄둬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서울뿐 아니라 치열했던 지방사의 조각들이 모여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상으로 난 문을 활짝 열었던 부산! 이곳에 가 보면 지금도 구석구석에서 그때 그 시절의 상처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부산은 매 순간 기죽지 않고 다시 우뚝 일어섰기에, 깊이 패인 옛 상흔을 어루만지면서 미소를 머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 부산 아이가!” “복병산 기슭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피란민들은 사십계단을 힘들게 오르내려야 했다. 일제가 산을 절개하는 토목공사를 벌인 탓에 급경사가 생겨났고, 이리로 지나다니는 사람을 위해서 사십계단이 조성되었다. 아, 피란민의 삶도 이 가파른 사십계단과 같았다. 어깨에 짐을 진 채로 아슬아슬하게 사십계단을 오르다 보면 저 멀리 부산항 바다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층에 도착할 즈음에는 아무리 삼수갑산을 넘나들던 무쇠다리 함경도 사나이라 한들, 오금이 저리고 맥이 풀리기 일쑤였다. 층층계단에 앉아 먼바다를 보자니 이북 고향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때 어디선가 이웃에 사는 경상도 아가씨가 다가와 애처로이 묻는다. ‘보이소, 와 그라요, 고향 생각나서 그런가 본데 힘을 내이소'”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시작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서 부산시 금정구 구서동에 이르는 고속도로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왕복 4차선 도로로 준공되었다.115 서울의 수도권과 부산의 영남권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물류와 교통의 혁신을 가져왔다. 경부고속도로는 국가 경제의 대동맥이자 일일생활권을 상징하는 교통로가 되었다. ‘마이카 시대’, 즉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부른 것도 경부고속도로였다. 이후 정부의 도로 정책은 대동맥과 혈관들이 이어지듯이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에 두고 이뤄졌다. 경부고속도로를 통해서도 부산은 서울을 잇는 제2도시로서 전국적인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후 서울-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이미 경부선이 깔려 있었고 국도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물류 산업의 대동맥이 되어 주었다. 경부 성장축을 통해 바다와 맞닿은 부산은 ‘수출과 무역의 최전선’으로 입지를 다졌다. 부산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었고, 신발과 섬유산업으로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앞장섰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얘기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는 치열하고 숨 가빴던 이야기들이 있다. 우리는 빼곡하게 들어앉은 신발공장 안 여성 노동자들의 사진을 통해 24시간 쉴새없이 가동되던 공장의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2교대로 근무했던 노동자들을 기억한다. 가파른 성장과 화려한 영광 이면에는 고된 노동과 이름 모를 희생이 있었다. “1978년 컨테이너 수출입항으로 본격적 채비를 갖춘 부산항은 우리나라 수출입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1979년 전국적으로 컨테이너 수출물량 비중이 34.6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부산항이 컨테이너 수출 수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8.6퍼센트였다. 컨테이너 수입 수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93.8퍼센트였다.131 컨테이너를 이용한 수출입은 거의 부산항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는 수치다. 경부고속도로와 부산항을 잇는 부산 도시고속도로는 컨테이너를 전국에서 부산으로, 다시 부산에서 전국으로 원활하게 이동시키는 물류체계로 작동하였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미국과의 교역도 매우 유리한 위치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에 편중되었던 무역구조는 부산항의 지위를 ‘굴지의 무역항’으로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60년대 수영강 하구에 고려제강과 태창목재 등 공장이 입주했지만 1970년대까지는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골산을 허물어 삼익비치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1980년대 민락 공원 일대를 메우면서, 관광과 상업의 중심지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수영이 인기 높은 주거 단지로 탈바꿈했다. 이제 수영강 하구의 전통 마을이었던 보리전과 널구지 자리에는 회색 아파트 단지만 무성할 뿐이다. 찰스 버스턴의 사진을 보거나 광안리 모래밭에서 과거의 수영 문화를 어슴푸레 회상해야 한다. 넓은 모래톱이 조성되었던 수영강 하구, 수심이 얕아서 무릎까지 바지를 걷은 채로 조개를 잡던 그 시절을.” 부산의 바다에서, 나를 건져올린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부산은 가마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역사의 최전선에 선 부산이 뜨거운 열을 은근한 온기로 전도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쏟아지는 외적들의 총탄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부산이 가마솥이 된 이유는 우리나라 해안가를 괴롭히는 왜구들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골칫거리인 왜구들은 역사의 ‘뜨거운 불’이었다. 이 뜨거운 불을 견뎌야 할 공간으로 낙점된 곳이 삼포(현재의 창원, 부산, 울산)였다. 조선 정부는 날뛰는 왜구들을 안정시키고자 삼포를 열어줬다.” “부관연락선의 등장으로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를 맞이하였다. 부산이 근대 조선의 관문이 된 것도 부관연락선 때문이었다. 부관연락선은 근대의 문화를 싣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건너왔다. 부관연락선에서 내려 첫발을 딛는 곳이 부산항이었으므로 일본인은 물론이요, 서양인들도 부산을 통해 조선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부관연락선이 취항함으로써 부산은 식민지화의 아픈 길을 걷게 된 동시에 국제적인 관문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이렇게 근대는 제국과 식민의 등에 업혀 조선으로 왔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오늘날 부산을 떠올리면 여름 피서객으로 가득한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 시끌벅적하고 분주한 국제시장, 그리고 종일 큰 선박이 바쁘게 오가는 부산항의 이미지가 늘 함께 한다.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곳엔 예외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힘 있고 거친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 뒤로는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가 보이는 듯하다. 삶은 늘 복잡다단하며 하나로 정의되기 어렵다. 세기를 거슬러 조선시대에도 삼포개항 이후 물밀 듯 들어온 왜인과 조선인 간에 이 평화가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긴장도 있었지만, 형제, 이웃처럼 지냈던 모습이 공존하였고, 근대로 무장한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던 전근대의 조선 한켠에는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고자 했던 의지가 드러나는 ‘초량왜관’이 있었다. “근대의 교통수단은 시공간을 축소시켜 멀고도 먼 일본을 가깝게 만들었다. 조선에 오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항하고자 하는 조선인들도 크게 늘었다. 부관연락선은 염상섭이 쓴 근대소설 『만세전』에도 등장한다. 부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주인공 이인화는 ‘부산을 조선의 축소판’이라 말하였다. 덧붙여, ‘부산의 팔자가 조선의 팔자요, 조선의 팔자가 곧 부산의 팔자’라고 하였다. 그렇다. ‘부산의 운명은 곧 조선의 운명’을 상징할 정도로 부산은 그야말로 조선을 집약시킨 축소판이었다.” “부산 거류지의 일본인은 마치 지배자처럼 행동하였다. 정작 주인이 되어야 할 조선인은 피지배자처럼 착취를 당하였다. 경제적 종속관계가 조선인을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추락시킨 것이다.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일본인은 거류지 외에 주변 토지를 마구 사들였다.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가옥과 토지를 저당잡힌 채 고리대금으로 돈을 빌렸다. 그러나 종국에는 비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여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큰 흐름의 역사는 물살 한 번에 작은 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버리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남아 있는 건축물과 유물들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일제 치하에서 부산은 근대 도시로 거듭났지만 가난한 조선인들은 소외되고 쫓겨났다. 그러나 산비탈과 변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거대한 억압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들불처럼 번졌던 독립만세의 함성은 현대로 이어져 어둡고 암울했던 유신체제 아래 민주주의를 외치는 함성으로 메아리쳐 돌아왔다. “부산의 6월 항쟁은 일찍이 꾸려진 강고한 지도부를 기반으로 전국의 민주화운동을 모범적으로 선도했던 투쟁이었다. 그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약한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는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민주화 투쟁의 역량을 쌓았다. 그뿐만 아니라 인적·조직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투쟁의 최전선에서 기폭제가 되었던 부산의 6월 항쟁은 부산 시민의 민주주의 정신을 고양한 학교이자 우리나라 대통령까지 잉태한 역사의 자궁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난 역사에서 오늘의 아픔을 본다. 그리고 과거의 이들이 어떻게 역경의 파도를 넘어왔는지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를 마주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용기와 희망을 건져 올린다. “옛 우물에서 새로운 물을 긷는다(舊井新水)”는 말처럼, 단연코 부산은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굳건한 힘을 선사해준다.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세상에 의문을 던지는 53가지 철학 이야기 이충녕 | 도마뱀출판사 | 2023년 06월

철학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 책 소개 철학자들의 생각과 철학의 가치,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가꿔주는 철학이라는 언어!철학이라는 말, 참 어렵다. 우리는 흔히 철학을 골치 아프고, 현실과 동떨어지고, 알쏭달쏭해서 알아듣기 어려운 그 무엇으로 생각한다. 철학을 몰라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딱히 알고 싶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멀리 있지 않다.우리는 모두 철학자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게 모르게 자기만의 철학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가치와 기준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고민과 선택의 바탕에는 철학이 깔려 있다. 철학이 없이는 인간도 없고, 철학이 없으면 인간다운 삶도 없다.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철학은 계속 이어지며, 인간과 삶과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해 왔다. 그것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 삶의 의미, 행복, 인간관계, 성공, 사랑 등등을 고민할 때 우리는 철학을 하고 있다.■ 저자 이충녕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존재의 의미를 찾겠다는 포부로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의미는 정답처럼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철학자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재료일 뿐, 이를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개인의 역할을 중시한다. 주된 관심사는 실존주의, 심리철학, 인지과학 등이지만,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 분야를 두루 익히기를 추구하며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가 있으며, 유튜브 채널 〈충코의 철학〉을 운영 중이다. 다양한 글쓰기와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차례들어가며물처럼 산다는 것 - 노자철학의 원리 1 : 절대주의를 의심하기 - 소크라테스철학의 원리 2: 상대주의를 경계하기 - 소크라테스세상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원리 - 데모크리토스예술을 국가로부터 추방하려 했던 철학자 - 플라톤행복은 절제에 달려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도덕의 근본은 이성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 맹자와 셸러고양이에게도 예술작품은 아름다울까 - 엠피리쿠스원효대사 해골물의 진짜 의미 - 원효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데카르트의 숨겨진 뒷이야기 - 데카르트가장 잘 당하는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이다 - 스피노자원인이란 과연 무엇일까 - 흄칸트의 윤리학: 나비효과로 살인을 저질렀다면 - 칸트칸트의 미학: 예술은 놀이다 - 칸트정언명령 쉽게 이해하기 - 칸트공포가 선사하는 즐거움 - 버크예술을 배워야 하는 철학적 이유 - 실러3이라는 수를 사랑했던 철학자 - 헤겔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래 - 밀신은 죽었다의 진짜 의미 - 니체규칙을 파괴하는 자, 초인 - 니체해리포터는 존재할까 - 마이농잠시 멈추고 태도를 바꾸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 - 후설철학의 천재가 뒤집은 존재에 대한 생각 - 하이데거엄마는 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다 - 하이데거존재는 시간이다 - 하이데거악마에 대하여 - 힐데브란트똑똑함이 무서움으로 변할 때 - 호르크하이머코로나 위기로 또다시 떠오르는 전체주의 - 포퍼과학과 철학의 만남, 과학철학 - 헴펠감정의 마법적인 힘 - 사르트르배경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 - 메를로퐁티당신의 판단을 결정하는 배후의 이론들 - 콰인매체는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 맥루한자유로운 사형수 - 카뮈나라는 주체는 주변의 힘에 의해 구성된다 - 푸코중국어 방 논증, AI는 생각할 수 있을까 - 존 썰대학교 2학년 때 MIT 대학원에서 강의했던 천재 철학자 - 크립키알파고는 바둑에서 상대방을 이기고 싶어 할까 - 호글랜드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도덕적 잘못 - 싱어인간 정신은 사물까지 연장되어 있다 - 클라크모든 나라가 서로를 돕는다면 어떻게 될까 - 자오팅양국가라는 틀을 뛰어넘어서 생각하기 - 세이거내로남불에 대한 철학자의 남다른 생각 - 도버환경보호 활동가가 매연을 배출하면 비난받아야 할까 - 벡충코의 철학적 단상 - 논리학이란 무엇인가충코의 철학적 단상 - 수학을 배우는 이유, 신의 언어 수학충코의 철학적 단상 - 확실한 지식은 존재하는가충코의 철학적 단상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우분투 철학충코의 철학적 단상 - 올림픽이 감추는 진실충코의 철학적 단상 - 죽음에 관한 인류의 생각충코의 철학적 단상 - 꼭 지켜야 할 삶의 원칙, 자비의 원리 이충녕 | 도마뱀출판사 | 2023년 06월 철학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물처럼 산다는 것 - 노자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시작될 때, 양쪽에서 모두 물을 주목했다는 것은 완전한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서양에서는 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전까지는 신화적인 믿음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일차적으로 설명되었다. 그런데 탈레스는 세상의 근본 원리를 물이라는 하나의 물질에서 찾았다. 이런 원리적 사고가 미세입자의 운동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적 사고의 발판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철학이 태동하던 시기에 동아시아에서도 똑같이 물이라는 대상에 주목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노자이다. 탈레스가 세상 만물이 생성되고 운동하는 과학적인 원리를 물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면, 노자는 물의 움직임 안에서 천하를 얻는 정치적인 원리를 찾아내려고 했다. 노자는 그 생애가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주나라의 도서관장을 지내다가 나라의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소 한 마리에 올라타 유유히 관문 밖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관문을 나서기 전, 그는 관문을 지키는 관리가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하자 5천 자의 글을 써주었는데, 그것이 『도덕경』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신비로운 이미지 때문에 노자의 철학은 속세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자연 친화적인 말, 또는 치열하고 답답한 경쟁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 정도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노자의 철학은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서 최선의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치학적 이론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은 현대의 게임이론과 맥을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노자가 물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물처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물에 관한 노자의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구절이다. 여기서 선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남을 위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은 사회 안에서 탁월함을 발휘하며 최고에 오르고, 그것을 필요한 만큼 오래 유지하며 사람들과 화합을 이루어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노자는 이러한 어려운 일을 이루기 위한 전략으로서 물처럼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그렇다면 물은 어떤 특성을 가졌길래 물을 본받아 행동하면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일까? 먼저, 물은 다른 것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흘러간다. 보통 다른 사물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위로 뻗어나가려 한다. 나무는 햇볕이 있는 위로 자라나야 좋은 나무이며, 건물은 안전한 높이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 좋은 건물이다. 사람 역시 양지바르고 공기가 맑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반면, 물은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밑을 향해서 흐른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가장 어두운 곳으로 흘러간다. 그곳은 어두침침하고 냄새가 나는 하수구일 수도 있으며, 깊숙한 진흙탕일 수도 있다. 물은 그런 곳을 피하지 않는다. 그저 길을 따라서, 깊이, 더 깊이 흘러간다. 이런 물의 특성을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곳에 가는 것을 서슴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피하는 일을 도맡아 할 것이다. 처음에 보기에 이런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하찮게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밑으로 어두운 곳으로 흘러 들어가 남들이 쳐다보지 않은 분야에서 자신의 입지를 가져온 사람이 나중에 가서는 최고의 성과를 올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가기를 스스로 자처함으로써 전체 시스템의 가장 밑을 떠받치는 곳에 숨어 들어가 그곳에 대한 장악력을 키운다. 그럼으로써 나중에는 시스템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양지바른 곳에서 잘 닦여진 길만을 걸어간 사람들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 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그들이 이 시스템 속에서 많은 도움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에 큰 혼란이 생기고 시스템이 붕괴하여 지금 운 좋게 누리고 있던 안정적인 체계가 무너진다면, 물처럼 밑으로 흐르지 않고 나무처럼 햇빛을 쫓아 위쪽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 가장 낮은 곳에 가기를 스스로 자처할 수 있어야 위기와 혼란이 가득한 환경 속에서도 가장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노자는 물에 관해 이야기하며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라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익숙하게 듣는 그 말을 남겼다. 물은 가장 약하고 가장 부드럽지만, 가장 강하고 굳센 것들을 압도하는 힘을 품고 있다. 이는 진부한 말이지만, 실생활에서 실천하기는 어렵다. 잘하려다 보면 자꾸 힘이 들어가고 뻣뻣해진다. 그럴 때면 항상 물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철학의 원리 1 : 절대주의를 의심하기 - 소크라테스 나훈아의 테스형!이 큰 인기를 끌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생의 의미를 질문하는 노래이다. 왜 나훈아는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소크라테스에게 질문을 던졌을까? 아마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대개 안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은 그토록 독점적인 유명세를 차지할 만한 정당성을 갖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의미에서 철학을 시작한 사람이며, 그 뒤로 펼쳐진 모든 철학, 모든 학문, 나아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전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사고방식의 시초가 된 사람이다. 나는 그 사고방식을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중도라고 표현하고 싶다. 시각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상대주의자일 수도 있고 절대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는 기존에 확고한 지식이라고 받아들여지던 앎의 체계를 깨부수려고 했던 사람이며, 특정 지식의 절대화에 격렬히 저항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지식이 단지 사람에 따라,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된 자세를 동시에 취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자기모순인 듯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조상으로 대우받는 것은 바로 이 상반된 견해를 매우 획기적으로 통합했으며, 그럼으로써 앎이라는 것 전반에 걸쳐 우리가 취해야 할 모범적인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안다. 내 생일이 언제인지, 친구 이름이 무엇인지, 미국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앎은 굉장히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많은 경우 앎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걸까? ‘붉은 노을’이라는 제목? 노래의 멜로디? 가사? 어렴풋한 느낌? 여기서 붉은 노을에 관한 앎이 과연 무엇인지 엄밀하게 설명하라고 해본다면,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사례로, 우리는 인천을 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런데 인천은 무엇일까? 인천의 부지? 인천 시민들의 집합? 인천의 행정체제? 아마 우리가 인천을 안다고 말할 때는 보통 이 여러 가지 요소가 아주 불분명하게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인천을 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말하는 데 별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인천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인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제시할 수 없다면 과연 인천을 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한 것일까? ‘앎’은 이토록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지만, 그 정체는 신비에 싸여 있다. 소크라테스는 앎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질문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 이전까지는 앎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인천을 안다고 말할 때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비로소 처음으로 “앎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아는가?” 하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전환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소크라테스는 말꼬리를 잡음으로써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 말꼬리 잡기가 서구의 지식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진보의 시작이었다. 말꼬리를 잡지 않는다는 것은 주어진 지식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럴 때 그 지식은 고정된 지식, 절대화된 지식이 된다. 그렇게 되면 지식은 더 이상의 발전을 멈추고 정체된다. 계속해서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야만, 끊임없이 비판하고 문제점을 개선하려 노력해야만 지식은 더욱더 좋은 모습을 갖춰나간다. 칸트의 윤리학: 나비효과로 살인을 저질렀다면 - 칸트 선과 악은 자주 말해지는 주제이다. 영화에는 선한 주인공 무리가 있고, 악한 반동인물 무리가 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선하고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악에 가득 차 나쁜 짓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한 선과 악이라는 현상과 관련해 우리가 가끔 묻곤 하지만, 결코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지나치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과연 무엇이 선한 걸까? 무엇이 선한 것인지에 대해 완벽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쯤 세상이 조금은 덜 복잡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엇이 선한지에 대해 철학자들은 나름의 좋은 설명을 내놓으려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조금 독특한 생각을 했던 철학자가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칸트이다. 선에 대한 칸트의 생각은 정말 독특하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어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지지와 사랑을 받는다. 칸트의 생각이 독특한 점은 우연히 선한 것과 우연하지 않게 선한 것을 강하게 구별했다는 것이다. 자, 지금도 이 세상에서는 당연히 수많은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자신의 의지로 선한 일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저 우연히 선한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한 사업가가 그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풍력발전소 건설에 투자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투자하여 건설한 풍력발전소 덕분에 우리나라의 미세먼지가 크게 줄었다고 해보자. 이때 그 사업가는 분명히 선한 일을 한 것이지만, 그 선한 일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 것이다. 그저 돈 때문에 투자했을 뿐인데 선한 결과가 뒤에 따라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 청년이 강가를 지나가다가 강에 빠진 어린아이를 보고 마음속에 선한 의지가 끌어올라 얼른 물에 뛰어들어 아이의 목숨을 구했다고 해 보자. 이때 이 청년은 전혀 우연에 의존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점에 따라서 선한 행동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 것이 중요하지, 그 과정은 어떠해도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실 행동의 결과만 놓고 보면 사업가의 선한 파급력이 훨씬 더 클 수도 있다. 그가 풍력발전소에 투자한 덕분에 공기의 질이 개선되면 미세먼지 관련 질환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수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청년은 그저 한 아이의 목숨을 구했을 뿐이다. 결과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청년보다 사업가가 더욱 선한 일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어쩐지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든다. 아무리 결과적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도 그 선한 결과가 그저 우연에 의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선한 의지로 한 행동에 비해 더 선하다고 볼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칸트는 바로 이 부분에 집중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언제나 우연적 요소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내가 의도한 대로 모든 게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에서의 행동은 많은 경우 의도한 그대로의 결과로 이어지 않으며, 때로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저 주차하려던 것뿐인데 옆 차를 긁기도 하고, 흔들리는 버스에서 내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꽉 줬을 뿐인데 넘어지려는 옆 사람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행동의 결과를 바탕으로 선과 악을 따지는 것이 정당할까? 누구나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완전히 알 수 없다. 완전히 선한 의지로 행동했는데 세상에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고, 완전히 악한 의지로 행동했는데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수도 있다. 내가 오늘 버스터미널에서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를 부축해드려 고속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드렸는데 그 할머니가 고속버스 운행 중에 버스 기사와 말다툼하는 바람에 고속도로에 10중 추돌사고가 발생해 수십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할머니를 도왔던 나의 선행은 순식간에 수십 명을 죽음으로 이끈 참혹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내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결코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 과장을 보태자면 결과는 무작위다. 그렇다면 결과가 아닌 다른 데서 선와 악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칸트는 오직 선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말한다. 칸트의 주장은 어떤 결과가 발생하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선한 의지만큼은 그 자체로 선하다는 것이다. 만약 결과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따진다면, 선이 되는지 악이 되는지는 일종의 도박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내 행동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기상천외한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결과보다는 오히려 의지에서 선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결과로 이어지건, 애초에 선하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순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멈추고 태도를 바꾸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 - 후설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크 후설은 지식과 태도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한 바 있다. 후설은 특정한 종류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태도를 바꾸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평소 우리는 별 의식 없이 특정한 태도를 취한다. 수학을 공부할 때 ‘나 이제부터 수학을 공부하기 위한 태도를 취해야지!’라고 수학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은 수학을 공부하는 상황이 되면 자동으로 수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동으로 태도가 바뀌지 않는 경우이다. 어떤 학생들은 수학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려도 수학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런 학생들은 아무리 훌륭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간단한 함수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만다. 후설은 이런 일이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도 자주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속한 지식의 전통에 익숙한 사람은 이미 특정한 태도를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취해 온 상태이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태도를 바꿔서 다른 분야의 지식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설은 직접적이고 투박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판단중지’이다. 판단중지란 평소에 세사을 바라보던 판단의 방식을 잠시 멈추고 순수하게 그 순간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에 집중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평소에 자신이 회사원의 시각에서만 회사를 바라봤다면, 학생의 시각에서만 학교를 바라봤다면, 국민의 관점에서만 국가를 바라봤다면, 한번 지금까지 당연하게 내렸던 판단을 중지하고 순전히 그때 떠오르는 느낌대로 그 대상을 고찰해보자. 그러면 그간 자신의 유연하지 않은 태도 때문에 막혀 있었던 이해의 통로가 뚫릴 수도 있다. 이런 판단중지는 철학자나 여타 학자에게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지식을 얻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이다. 존재는 시간이다 - 하이데거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시간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체험하는 시간보다는 추상적인 시간을 곧장 떠올린다는 것이다. “시간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듣고 ‘퇴근하고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 혹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지금까지 지나왔고, 앞으로 취직의 문이 기다리고 있는 길’처럼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시간을 떠올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보다는 대개 ‘1초, 2초 흘러가는 것’이라는 양적이고 추상적인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이해 방식이 진정한 시간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고 생가했다.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가장 근원적인 시간은 우리가 미래를 예감하고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그런 시간이다. 여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 여름까지의 시간이 앞에 펼쳐진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했던 여행을 추억하면 과거로 시간이 쭉 뻗어나간다. 만약 이렇게 우리가 그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과 사건이 없다면, 즉 우리가 기대하고, 두려워하고, 바라고, 후회하고, 추억하는 그런 고유의 의미들이 있는 지점이 없다면 시간은 그저 동일하게 쭉 펼쳐진 사막 혹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공간같이 느껴질 것이다. 하이데거의 생각에 따르면 엄마가 오시길 기다리는 마음이나 어제의 즐거웠던 데이트처럼 의미가 있는 지점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시간을 ‘셀 수 있다.’ 엄마를 기다리면서 하나, 둘, 셋 하며 시간을 세어보는 경험이 있어야만 시간이 흘러간다는 게 뭔지, 시간을 더하면 더 긴 시간이 된다는 게 뭔지,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 엄마가 빨리 오시면 그 시간은 ‘짧은’ 것이고, 기대했던 것보다 엄마가 늦게 오시면 그 시간은 ‘긴’ 것이다. 만약 이러한 시간의 짧고 긺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가 없다면, 5분과 1시간 사이의 차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온통 하얀색뿐인 벌판 안에서는 한 걸을 가든 만 보를 가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듯이, 체험적인 의미가 있는 지점들이 없다면 5분이나 한 시간이나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사형수 - 카뮈 사형수는 모든 희망을 빼앗긴 사람이다. 그는 부자가 될 수도 없고, 가족을 이룰 수도 없고, 명예를 얻을 수도 없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모든 희망을 버림으로써 그는 오히려 가장 절대적인 자유를 얻게 된다.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불안도, 집착도 없다. 그는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저 현재의 순간을 살게 된다. 그렇게 그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감옥 안의 환경이 허락하는 한 그는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다. 무언가를 꼭 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꼭 안 해야 할 이유도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일지도 모른다. 카뮈의 사형수 이야기는 진짜 사형수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미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사형수다. 죽을 운명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에게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여러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사형수와 달리 우리에게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많은 일을 이룰 가능성이 열려 있다. 아이를 갖는다든지, 아름다운 집이나 안정적인 노후를 보낸다든지 하는 일들은 상상만 해도 아주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 같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희망이 때로 족쇄로 다가올 때 카뮈의 사형수를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기분 전환이 될 수 있다. 우리도 결국 모두 사형수의 신세이므로, 본질적으로는 어떤 희망에도 집착해야 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희망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역설적으로, 그렇게 해서 희망이 없는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다시 희망을 품어도 상관없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패션, 색을 입다

10가지 색, 100가지 패션, 1000가지 세계사 캐롤라인 영 | 명선혜 번역 | 리드리드출판 | 2023년 05월

패션, 색을 입다

■ 책 소개 컬러, 패션, 인간을 파고드는 지적 여행!10가지 컬러와 패션이 들려주는 화려한 이야기의 향연우리는 다채로운 컬러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다양한 색채는 인류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왔다. 문화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남자와 여자는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죽음을 맞이할 때도 정해진 색의 수의가 입혀진다. 이렇게 컬러는 국가별, 시대별로 다른 의미가 있다.빨간 드레스 효과를 아는가? 최신 연구에 따르면 빨간 옷은 특히 여성이 입었을 때 욕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다른 색상의 옷을 입었을 때보다 더 많은 남성의 관심을 끈다. 로체스터 대학교의 색상 심리 실험에 따르면 빨간색 옷을 입거나 붉은 색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여성은 남성들로부터 더 매력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저자는 칵테일 파티에서 녹색 드레스를 입으면 어떤 의미가 있고, 여성 정치인이 흰색 바지 수트를 입으면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등 10가지 컬러에 담긴 숨겨진 상징성과 컬러에 따른 패션의 역사를 치밀하게 탐구한다. 시대와 세계를 넘나들며 컬러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각 컬러가 가진 상징이 변화해 온 과정을 저자와 함께 여행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과 장소, 상황에 어울리면서도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컬러를 찾게 되고, 패션 센스를 갖추게 될 것이다.■ 저자 캐롤라인 영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영어와 영화 및 TV 연구를 공부한 후 호주 브리즈번에서 저널리즘 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헤럴드 스코틀랜드(Herald Scotland)에서 패션 작가 및 보조 디지털 편집자로 일하면서 스코틀랜드 패션 산업과 패션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1990년 토론토에 본사를 둔 그래픽 디자인 회사 햄블리와 울리(Hambly & Woolley)를 창업했다. 그 이전부터 오랜 기간 《뉴욕타임스》, 《타임》, 《선데이 매거진》 등 많은 매체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북미 전역에서 수많은 수강생에게 디자인과 관련된 강의를 하면서 초빙대상 1순위의 실력 있는 강사로 인정받았다.지금은 컬러 스터디(https://www.colourstudies.com/)라는웹사이트를 운영하며 사진, 미술, 저술 분야에도 집중하고 있다. 컬러는 그의 모든 활동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며, 이번 책을 위해 로스앤젤레스의 기록보관소에서 영화사 및 의상에 관한 조사 활동을 광범위하게 펼쳤다.패션과 영화사 전문 작가로 꾸준히 글을 써 오고 있으며, 《타르탄(Tartan)》, 《트위드(Tweed)》, 《스타일 트라이브스(Style Tribes)》, 《클래식 할리우드 스타일(Classic Hollywood Style)》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다. 또한 인사이트 에디션(Insight Editions)의 《히치콕의 여주인공들(Hitchcock.s Heroines)》과 더히스토리 프레스(The History Press)에서 출간한 《로만 홀리데이(Roman Holiday)》의 저자이기도 하다.■ 역자 명선혜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통역번역학을 전공했다. 한영국제회의통역사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클래식 음악 분야 통번역 경력을 통해 거의 준전문가 수준의 전공 지식이 있으며 현재는 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브랜드 경험의 본질》, 《쓰레기의 정치학》, 《더 스타트》, 《성공하는 여자의 자격》 등이 있다.■ 차례IntroductionBLACKPURPLEBLUEGREENYELLOWORANGEBROWNREDPINKWHITE참고문헌 캐롤라인 영 | 명선혜 번역 | 리드리드출판 | 2023년 05월 BLACK 패션에서 블랙은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캔버스다. 1950년대 급진적인 보헤미안이라 불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폴로 목티를 입고 미국의 반체제 문화의 성역인 그리니치 빌리지의 허름한 술집에 모여 비트를 즐겼다. 1990년대 이후 블랙은 누구나 쉽게 입을 수 있는 주요 패션 아이템이 됐다. 이러한 차림의 패션은 평범함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놈코어’라 불렸다. 시대를 초월하여 세련된 멋을 내는 블랙은 상복으로 입으면 슬픔과 상실을 나타낸다. 무솔리니의 블랙 셔츠는 파시스트적 위협을 나타내고, 미국의 흑인 무장 조직인 흑표당의 블랙 베레모는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강력한 표상이 되었다. 블랙은 표현의 부재, 즉 표현의 자제를 상징하며 결과적으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펑크 음악의 대부 말콤 맥라렌은 “블랙은 불필요한 장식에 대한 공개적 비난입니다. 허무주의, 지루함, 공허함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블랙이죠.” 색상으로서의 블랙 블랙은 물체가 가시적 파장을 삼켜 색 스펙트럼의 모든 빛을 흡수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눈에 보인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검은색은 존재하지 않는 색이다. 블랙을 색상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블랙이 가장 오래된 색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중세 초기 기독교는 엄격한 도덕규범을 내세워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을 죄악으로 간주하며 소박한 검정 옷을 입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여겼다. 1346년 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전멸시키자 예술은 해골과 귀신같은 으스스한 공포 이미지로 당대의 희생과 고통을 표현했다. 스칼렛 실크 컬러가 15세기 이탈리아 초상화의 특징이라면,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부와 고상함을 나타내는 검은색이 주를 이뤘다. 르세상스 시대의 패션을 연구한 폴라 호티 에리히센이 1550년과 1650년 사이 베네치아, 피렌체, 시에나 지역에서 나온 유물을 조사한 결과 공예 장인의 의복 중 40% 이상이 블랙이었다. 루카스 데 헤레의 초상화에 담긴 메리는 금색 치마 위에 검은색 가운을 걸치고 왕좌에 앉아 있다. 펠리페는 검은색 더블릿(14~17세기에 남성들이 입던 짧고 꼭 끼는 상의)과 금색 반바지를 입고 그녀 옆에 서 있다. 그들의 의상은 웅장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검은색을 통해 도덕적 경건함과 종교적인 상징성을 표현했다. 팜므파탈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은 주로 과부를 상징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 블랙은 이브닝드레스의 컬러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팜므파탈적 묘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블랙 드레스의 관능적인 힘은 필연적으로그 옷을 입은 여성의 몰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레오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 영화 안나 카레니나 속 안나는 검은 옷을 입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무도회에 참석한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드러낼 색은 검은색밖에 없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우아하면서도 쾌활하고 열정적인 그녀에게 블랙은 자유를 주고 도전을 불러일으킨다. 안나처럼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과 블랙 컬러를 연관 짓는 것은 다른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할리우드는 악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담기 위해 초창기부터 블랙을 사용했다. 영화 신의 여주인공인 테다 바라는 검은 옷을 입은 뱀파이어에 영감을 얻어 긴 검은 머리와 끈이 없는 블랙 드레스를 선택하였다. 블랙 새틴을 입은 팜므파탈은 제2차 세계대전 말 누아르 장르에서 한때는 천사였으나 몰락한 존재로 등장한다. 영화 블랙 스완은 악한 유혹의 이미지를 검은색으로 제대로 살렸다. 영화 의상 디자이너인 에이미 워스트콧은 주인공 니나의 발레 의상에서 위축된 소녀스러움은 핑크와 화이트로, 마음이 뒤틀리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블랙과 그레이 컬러를 적용해 심경의 변화를 드러냈다. 검은 백조가 입은 검은 깃털과 검은 발레 스커트는 니나의 어두운 면을 온전히 감싸 안아, 그녀의 마지막 여정을 향해 가면서 정점에 다다른다. YELLOW 노란색은 꽃잎을 활짝 피고 햇볕을 정면으로 받는 해바라기나 1990년대 광란의 포스터 또는 티셔츠에 인쇄된 형광노랑빛 스마일 페이스와 같이 여름날과 낙관주의를 연상케 한다. 연한 미색의 목련, 버터, 레몬에서부터 해바라기, 사프란, 겨자, 형광에 이르기까지 노란색은 감정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여기는 심리학적인 원색이다. 노란색은 자극적이면서도 낙관적인 감정을 북돋울 수 있지만, 압도적이기도 하며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긴 파장을 가진 노란색은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보이기 때문에 도로나 건설 현장에 배치되어 확실한 주목 효과를 내며, 매우 실용적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많은 문화권에서 노란색은 태양과 황금을 상징하는 색이었으며, 생명을 주는 힘과 부를 상징하는 화려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에게 노란색은 꿀과 벌, 그리고 잘 익은 곡식의 색을 의미했다. 수확과 풍요의 여신인 세레스는 종종 노란 드레스를 입고 금발에 밀 왕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가시성 때문에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혐오스러운 상징물에도 사용되었다. 바로 유대인의 노란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독일과 점령 지역의 유대인에게 노란색 다윗의 별을 옷에 착용하도록 강제했다. 이는 유대인을 게토로 옮긴 후 최종적으로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서곡으로서, 신분 확인과 분리 작업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노란색이 두려움과 박해를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괴테는 노란색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노란색은 밝고 부드럽고 유쾌한 색이지만 빛이 약하면 금세 불쾌해지며 조금만 많아지면 더럽고 추하고 재미없어진다.” 노란 비단과 국화 고대 중국에서 노란색은 철학, 의학 및 풍수에 사용된 오행론의 오색 중 하나였다. 지구를 상징하기도 하는 만큼 가장 귀한 존재로 여겼던 노란색은 금과 부, 태양의 빛, 장수와 건강을 상징하는 국화꽃의 색이기도 하다. 청 왕조와 같은 특정 시대에는 황제와 황후만이 입을 수 있는 귀한 색으로 대접받았다. 중국을 중앙집권 국가로 만든 5명의 전설적 황제 중 첫 번째 황제 ‘Gongsun Xuanyyuan'은 중국 문화의 중요한 측면을 확립했다. 그의 황후 Lei-Tzu는 차를 마시던 중 찻잔에 떨어진 고치 뭉치를 꺼내다 우연히 비단실을 발견한다. 이 비단실로 짠 실크는 고대 중국의 귀한 상품이었기에 짜는 방법은 철저히 기밀로 유지되었다. 누에고치에서 비단을 수확하는 ‘양잠’ 또한 매우 비밀스러운 기술로 다른 문명에서 비법을 알아내려 애를 쓰기도 했다. 상 왕조(기원전 1600-1046) 시대에 이르러 비단은 종교의식과 제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황후는 궁궐 내 누에 농장을 직접 감독하기까지 했다. 노란색의 부정적 의미 중세 시대의 노란색은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노란색은 질병, 질환 및 황달을 암시했으며, 4대 체액 중 하나인 황담즙과도 관련이 있다. 노란색 직물을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천연 물질이 있었지만 노랑은 오래 지속되는 빨강과 파랑에 비해 색이 빠르게 퇴색되었고, 이러한 특성들 대문에 불신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는 기형이나 질병이 있는 사람 또는 범죄자와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을 노란색 스카프, 모자 또는 배지로 구분하였다. 중세 미술에서 사형 집행인은 일반적으로 노란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노랑은 또한 반역자를 묘사하기도 했으며, 파산한 사람들의 집을 표시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노란색을 통해 유다의 이중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조토 디 본도네의 파도바 성당 프레스코 벽화에는 예수를 껴안은 유다가 노란색 망토를 입고 있다. 유다의 노란색 옷은 그를 반역자임을 뜻할 뿐 아니라 그가 유대인임을 의미했다. 반짝이는 모든 것 중세 시대 노란색이 지닌 부정적인 의미를 감안하면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노란색은 금이었다. 금은 영적으로 신성하게 여겨졌고 실크로드 무역에서도 수요가 높았다. 7천여 년 전에 처음 채굴되어 보석과 장식품으로 사용된 금은 그 희소성과 비용 덕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중국에서 페르시아와 지중해로 거래되던 실크는 로마인들이 매우 귀중하게 여겼다. 당시는 티리안 보라 실크가 가장 고급스러운 색상으로 알려졌으나, 압제적 황제였던 코모두스는 밝은 노란색 실크에 줄무늬가 있는 예복을 입었다. 그 옷은 매우 아름답고 밝게 빛나 마치 금사로 짜인 천은 화려하고 호화로운 빛을 발했다. 골드는 과도하게 착용하면 촌스러우면서도 ‘독재자 같은 딱딱하고 고압적인 분위기’를 내지만, 레드카펫에서만큼은 인기다. 매거진 엘르는 골드 드레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금빛 드레스는 리틀 블랙 드레스의 섹시한 여동생과도 같은 존재다. 활기차고 최면에 걸릴 정도로 황홀하며,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완전한 매력을 선사한다.” 패스트푸드 패션과 Z세대 옐로 노란색은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라는 구호와 함께 1960년대 반문화적 시대의 조화를 상징했다. 비틀즈의 옐로 서브마린 앨범과 영화는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했고, 도노반의 노래 맬로우 옐로는 ‘쿨하고 느긋한’ 내용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저서 율리시스에서 파생된 표현을 사용했다. 1960년대 희망을 상징했던 노란색은 1988년 사랑의 여름날을 상징하는 색으로 재등장한다. 애시드-옐로 컬러의 스마일 페이스는 광란의 파티와 엑스터시의 힘을 빌려 황홀한 기분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젊은 세대의 쾌락주의를 대변했다. 스마일 페이스는 1963년 미국의 광고 전문가 하비 볼이 보험 회사 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디자인되었으나, 이후 사이키델릭 운동의 축제 스티커로 사용되었다. 1988년 오리지널 런던 애시드 하우스 클럽 나이트 ‘Shoom’의 상징으로 채택된 후 앨범 커버, 배지 및 전단지, 패션 디자인 등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었다. 어린이의 기분 좋은 감정에 호소하여 부모의 구매를 유도하는 노란색은 패스트푸드 업계의 대표적인 컬러다. 맥도날드의 빨강과 노란 배색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색상이다. 편안함과 행복을 선사하는 노랑과 설렘과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빨강의 자극적인 조합으로 구성되어 시선을 잡아끈다. 노란색 포장지와 로고가 자주 사용되는 패스트푸드의 키치 미학은 현대 소비자에게 어필했으며, 노란색은 재미있고 순간적인 색상으로 받아들여지며 즉각적인 만족감을 선사했다. 팬톤은 2018년에 ‘Z세대 옐로’를 소개했다. 작가 헤일리 나만이 2017년 인스타그램 피드를 장식했던 밀레니얼 핑크가 노란색에 점점 밀리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이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고, 처지와 환경의 우려 속에서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에너제틱한 색상으로 꼽힌다. RED 빨간색은 사이렌, 교통 정지신호,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이 입은 바람막이처럼 경고의 신호를 나타낸다.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은 어딜 가나 눈에 띄게 마련이다.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의 제시카 래빗이나 사랑의 행로의 미셸 파이퍼 역시 레드 의상을 입고 관객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는다. 미셸 파이퍼의 빨간 옷은 그녀가 자신의 관능미를 온전히 컨트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빨간색은 시선을 사로잡는 색이기에 올 화이트 복장의 무도회에 등장한 빨간 드레스처럼 종종 부적절하거나 촌스러운 선택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영화 붉은 옷의 신부에서 조안 크로포드는 목조 건물 리조트에서 귀족인 척하는 카바레 가수 애니를 연기한다. 그녀는 항상 빨간 드레스를 꿈꾸었는데, 이는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상류 사회의 관습을 모르는 애니에게 청소부는 레드 드레스를 입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하지만 끝내 빨간색을 선택한다. 결국 애니는 이 레드 드레스가 너무 요란하고 싸구려이며 잘못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빨간색의 힘 빨간색은 불타는 태양, 붉은 머리 짐승, 전쟁과 혼돈, 폭력과 파괴를 상징한다. 또한 피, 힘, 생명을 의미한다. 종종 붉은 거들을 착용하는 다산의 여신 이시스의 핏방울을 상징하는 붉은 벽옥, 카넬리안 또는 붉은 유리로 만들어진 티예트 부적을 지닌 사람은 이시스의 보호를 받는다고 여겼다. ‘이시스의 매듭’이라 알려진 이 부적은 생리혈을 흡수하는 천과 비슷해 여성들에게 생명을 주는 힘을 연상케 한다. 구석기 시대에도 빨간색은 보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부적, 목걸이, 팔찌를 만들기 위해 뼈와 치아를 빨갛게 칠한 조각들이 매장지에서 발견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붉은 천과 보석이 무덤에 놓였는데, 그중에서도 루비가 가장 귀했다. 루비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성욕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을 자극하고 독이 있는 생물을 멀리 쫓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빨간색이 나타내는 불과 피는 삶과 죽음을 관장한다. 초기 기독교는 붉은색을 지옥의 파괴적인 불꽃, 악마, 악령과 연결했지만, 12세기와 13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 피의 상징으로 여겨 로마 추기경들도 붉은색 망토와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판사와 법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대표하기 위해 빨간색을 착용했다. 르네상스의 빨간색 1495년 파리에서 처음 인쇄된 문장학의 색깔에 대한 익명의 안내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미덕 중에서 빨간색은 고귀한 출생, 명예, 용기, 관대함, 대담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는 공의와 관용의 색이다. 빨간색은 다른 색들을 고귀하게 만든다. 빨간 옷 한 벌을 입은 사람에게 큰 용기를 준다. 녹색과 짝을 이룬 빨간색은 아름다움과 젊음, 그리고 기쁨을 의미한다. 푸른색과 함께 사용되면 지혜와 충실함을, 노란색과 함께 사용되면 탐욕과 욕망을 나타낸다. 빨간색은 검은색과 어울리지 않지만 회색과 함께 사용되면 큰 희망을 나타낸다. 또한 아름다운 흰색과 함께 사용되면 매우 높은 경지의 고귀함을 엿볼 수 있다.” 중세 시대, 빨간색은 전쟁이나 사냥에 나가는 남성에게 힘과 영광을, 여성에게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선사했다. 붉은 드레스는 매력적이고 매혹적으로 디자인되었다. 중세 마상대회에서 여성이 기사에게 사랑의 표시로 붉은색 소매를 주었는데, 이를 기사의 창에 묶으면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중세 영국은 양모 생산의 강국이었다. 15세기부터 서아프리카의 강국이었던 베냉왕국과 무역을 시작한 유럽에서 주홍색털실은 매우 귀중한 무역품 중 하나였다. 선명한 붉은색과 주홍색을 만드는 비용과 상징성으로 붉은색은 유럽 전역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시민들만 사용하도록 엄격히 규제되었다. 그리고 붉은색 천의 수입을 제한함으로써 국내 경제도 보호하고, 신분의 계급 차이를 드러낼 목적으로 1337년에 사치금지법이 도입되었다. 높은 염색 비용 때문에 베네치안 스칼렛이라 불렸던 연지벌레 염색 천은 고위층들의 전유물이었다. 염색 품질이 섞이지 않도록 꼭두서니와 연지벌레 기반의 염색 시설도 별도로 운영되었다. 꼭두서니 혹은 브라질우드로 염색된 레드는 종종 매춘부, 나환자, 죄수들에게 사용되었다. 이는 그들이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임을 상징했다. WHITE 작은 얼룩도 즉시 눈에 띄는 화이트진은 부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나타낸다. 지중해에서 값비싼 요트 파티의 복장이나 클럽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은 주로 화이트진을 즐겨 입는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흰옷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 옷이 더러워질 일이 없는 사람들, 즉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이 입었고, 19세기 이후부터는 여가를 즐기는 계층들이 시원한 흰색 린넨 정장과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세계의 문화적 전통에서 흰색은 순수함과 처녀성을 나타낸다. 고대 로마에서는 불과 부엌의 여신인 베스타의 여사제들이 순결의 상징으로 흰색 린넨 로브를 입었다. 값비싼 비단은 천국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진 이슬람 문화권에서 순백색 면 옷은 헌신을 뜻한다. 흰색은 갓 내린 눈, 우유,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색으로 단순함과 순수함을 의미한다. 백색광은 스펙트럼의 모든 색을 반사하기에 백색 물체는 다른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는 빈 캔버스가 된다. 오스틴 시대의 흰색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흰 드레스는 1790년부터 1820년까지 영국 섭정 시대의 신고전주의 패션을 반영했다. 소설 노생거 수도원에서 앨런 여사는 캐서린 몰랜드에게 엘리너 틸니가 항상 흰옷을 입으니 그녀를 만날 때는 흰옷을 입으라고 권한다. 오스틴은 캐서린 몰랜드와 헨리 틸니 사이의 관계 발전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색 모슬린을 사용했다. 흰색은 미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 낭만에 어울리게 우아하고 섬세하다.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혁명의 바람과 함께 여성복의 흐르는 듯한 실루엣은 고대 그리스 예술과 민주주의, 그리고 계몽정신을 담아냈다. 버드나무처럼 섬세한 실루엣은 고전적인 조각상 같았고, 하얀 모슬린, 케임브릭 또는 면이나 아마사 직물의 바슬거리는 순수함은 산업혁명 시대의 청결감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평평한 슬리퍼와 함께 편안함과 자유를 제공하는 옷차림이 되었다. 섬세한 흰색 직물의 아름다움에는 식민주의, 노예제도, 섬유산업의 노동자 착취라는 진정한 공포가 비밀리에 숨어 있다. 메그나 강둑에서만 자라는 목화로 제작되는 다카 모슬린은 16단계의 비밀 공정을 거쳐 정교한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노예들은 화이트 패션에 쓰일 면화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영국에서 수입된 거친 모직물이자 ‘흑인의 옷감’으로 알려진 화이트 웨일스 직물만 입을 수 있었다. 많은 노예가 이 거친 흰옷의 노예화와 그 상징성을 거부하고 자유인으로 보이도록 그들만의 미학을 창조했다. 흰옷을 인디고 식물로 염색하거나 호두나무 껍질에서 갈색 염료를, 삼나무 이끼에서 노란색 염료를 추출하는 등 식물학적 지식을 활용해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었다. 낡은 옷을 수선하기 위해 패치를 달거나 일요일에 입을 예쁜 드레스를 위해 다양한 컬러의 실을 직물에 짜 넣기도 했다. 하얀 결혼식 하얀 옷을 생각하면 결혼식에서 신부가 순결과 순수함을 알리기 위해 입는 정교한 프릴과 레이스가 달린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떠올린다. 현대 사회에서 순백의 웨딩드레스는 순결의 상징에서 점점 멀어지는 개념이긴 하나, 눈처럼 새하얗고 섬세한 실크, 새틴 및 레이스 달린 웨딩드레스는 그 자체로 의미가 남다르다. 18세기 패션 삽화에서 선명한 빨간색이나 다른 밝은 색상의 웨딩드레스가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샬럿 공주와 같은 왕실 신부들은 금사로 장식된 천을 선호했다. 그러나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은 결혼식에서 상아색 새틴 웨딩드레스를 입음으로써 흰색 웨딩드레스 관습에 새로운 시도를 가져왔다. 영국 여왕들의 삶을 책으로 쓴 영국 작가 아그네스 스트릭랜드는 “그녀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왕이기보다 순수한 처녀처럼 티끌 하나 없는 흰색 옷을 입고 신랑을 맞아했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처녀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아닌 데본 지역의 호니톤 레이스를 특별 주문하여 완성된 빅토리아 여왕의 웨딩드레스는 침체된 레이스 산업을 활성화시켰을 뿐 아니라 흰색 드레스의 붐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흰 드레스는 일반 여성에게 실용적이지도 않고 가격도 저렴하지 않았다. 흰 천은 깨끗하게 유지하는 비용뿐 아니라 한 번만 입고 말 드레스를 구입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여러 행사에서 입을 수 있는 드레스가 필요했기에 19세기 흰색 웨딩드레스는 누구나 갖고 싶어 하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이코노믹 허스토리

왜 경제학의 절반은 사라졌는가? 이디스 카이퍼 | 조민호 번역 | 서울경제신문 | 서경B&B | 202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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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지금껏 우리가 배운 경제학은 반쪽에 불과하다!”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목소리와 경제적 성과에 대한 재평가경제학(economics)은 18세기 후반 서유럽과 경제 패권을 쥐었던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 중심의 경제학자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패권을 가로챈 미국의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중심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적 연구(historical research)가 그러하듯 경제사상사 또한 무수히 많은 경제학자 중에서도 백인 남성(man)의 관점에서 채택된 이론이 뼈대를 이룬다. 하지만 경제사상사에 기록되지 않은, 오랫동안 외면받고 소외된 여성 경제 저술가와 경제학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경제라는 사회적 구성물의 각 분야에서 연구 및 저술을 통해 학문적으로 기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제에 관한 토론과 이론 전개의 장은 물론, 경제사상사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했다.오이코노미아에서 페미니즘 경제학까지“경제학이란 무엇이고, 누가 경제학을 연구하는가”경제학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평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이디스 카이퍼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진 여성과 젠더 평등에 관해 언급한 저술가들과 경제학자들의 흔적을 추적한다. 더불어 18~19세기 영국과 프랑스, 19~20세기 미국의 여성, 식민지 여성, 유색인종 여성의 경제적 활동을 묘사하면서 그들의 경제 문제, 투쟁의 역사, 경제적 관점 등을 다룬 저작들을 소개한다. 또 재산, 권력, 교육, 생산, 분배, 소비, 정부 정책 등의 분야에서 활동한 여성 경제 저술가 및 경제학자들의 발자취를 연대기 순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카이퍼 교수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제학자라는 개념에서 여성 경제 저술가와 경제학자가 빠지게 된 역사적 배경에 주목한다.■ 저자 이디스 카이퍼페미니스트 경제학자, 경제학 철학자, 역사가. 암스테르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뉴욕주립대학교 경제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제페미니스트경제학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93년 암스테르담에서 ‘아웃오브더마진: 경제 이론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관점(Out of the Margins: feminist perspectives on economic theory)’이라는 콘퍼런스를 조직했고,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의 페미니스트 경제학 네트워크인 FENN(Feminist Economics Network in the Netherlands)의 설립을 이끌었다.■ 역자 조민호안타레스 대표.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단행본 출판편집자로 일하면서 인문 및 경제경영 분야 150여 종의 책을 기획·편집했고 저작권 에이전트와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리더십의 심리학》, 《나에게는 지독한 인내가 필요해》, 《15분 만에 읽는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있다.■ 차례이 책의 주요 여성 경제 저술가들감사의 말서장. 경제학에서 사라진 여성들경제학의 역사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경제라는 사회적 구성물에서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오이코노미아에서 페미니즘 경제학까지제1장. 정치경제학의 등장오이코노미아, 가계관리에 관한 탐구중산층의 도덕제2장. 권력과 주체성 그리고 재산권경제적 추론의 권력경제 행위 주체로서의 여성재산권: 경제 제도로서의 결혼재산권: 노예 및 식민지 여성제3장. 교육문화와 사회를 향한 관문으로서의 여성 교육교육을 받아라! 학교를 시작하라!쉬운 언어로: 정치경제학 및 경제학 교육제4장. 부와 여성의 관계: 자본, 돈, 금융여성의 자본 통제력 상실여성에게 강요된 돈을 대하는 태도경제의 금융화제5장. 생산화폐화·시장화한 생산에서의 여성 참여산업에서의 젠더 분리자신들의 일을 지켜온 여성제6장. 분배분배의 이동 패턴경제 기사도와 임금 노동제동일노동 동일임금 논쟁젠더와 인종별 임금 격차 설명제7장. 소비소비를 이론화한 여성 경제학자들소비와 환경 문제제8장. 정부 정책정부의 역할지역 및 전 세계 공공재로서의 돌봄 서비스산업 폐기물 통제와 자연 환경 보전국제 경제 정책제9장. 앞으로의 경제학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경제사상사에 기록되지 않은 12가지 키워드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경제학반쪽짜리 경제학의 좁은 터널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주참고문헌찾아보기 이디스 카이퍼 | 조민호 번역 | 서울경제신문 | 서경B&B | 2023년 05월 정치경제학의 등장 오이코노미아, 가계관리에 관한 탐구 경제와 관련한 여성들의 초기 저작 대부분은 역사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자 아스파시아(Aspasia, 기원전 470~기원전 400)가 쓴 구절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만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 322)가 여성과 젠더에 관해 상당히 광범위한 글을 남겼다. 기원전 362년경 크세노폰이 쓴 ‘오이코노미코스(Oikonomikos)’에서 여성은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며 스승인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서 자주 언급된다. 소크라테스는 남성이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일을 분담하고, 젊은 아내를 현명한 주부가 되도록 훈련하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집안에 좋은 주부가 있는 것이 가계의 부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끊임없이 다투던 강한 아내(Xanthippe)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설명한다. 그의 지적이 날카롭고 유머러스하다. ‘오이코노미코스’는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크세노폰의 이 저작을 다루고 있는 경제사상사 교과서 중 대부분에서는 노동 분업만 강조할 뿐 본래의 분업, 즉 남성과 여성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젠더 분업은 언급하지 않는다. 후대의 경제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여성은 단지 불완전한 남성이었으며, 그의 이분법적 논리에 따르면 뜨겁고 적극적인 남성과 달리 여성은 차갑고 수동적인 존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하나는 먹을 음식과 입을 옷, 쉴 집을 제공해 가족 구성원의 생계를 유지할 목적의 재산 관리다. 그는 이를 ‘자연 경제’ 또는 ‘오이코노미아’라고 불렀다. 다른 하나는 이자가 발생하는 대출을 비롯해 가계 밖에서 이뤄지는 거래나 교역이다. 그는 이를 ‘비자연 경제’ 또는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처럼 자연스럽지 않은 경제는 억제돼야 마땅하지만 유지되고 있는, 결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필요악이었다. 중세 시대에도 학식 있는 많은 여성이 수도원에 기거하며 철학적·종교적 문헌을 남겼다. 예를 들면 베네치아의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san, 1364~1430)은 다양한 장르로 많은 글을 썼고 서유럽에서 여성 문제를 모국어로 표현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모든 여성이 교육을 받아야 하며, 여러 분야와 여러 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미덕과 관심,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개신교와 신흥 상인 및 중개인 계층이 부상하자 가정에 있는 여성은 이념적으로 더 길들여졌고 주부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하는 ‘남성의 성(城)’으로 인식됐다. 16세기에서 17세기까지 유럽의 귀족 여성들은 정치 문제에 발언할 권리를 어느 정도 갖고 있었으나, 특히 18세기 영국에서는 귀족 여성들조차 공적 영역에서 제외됐다. 가정 경제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정치와 교역, 산업적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의 영역이 됐으며, 가정은 여성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이전까지는 가계부 관리를 주로 맡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여성이 가계 운영 지식을 발전시키고 축적해 가계부를 작성하고 보관했다. 서유럽에서 가계관리가 점점 더 여성의 독점적인 역할로 변화함에 따라 공적 및 사적 영역에서의 젠더 구분 또한 정치철학의 논지로 떠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초기 사상가들의 전통적 견해를 따라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같은 근대 철학자조차 ‘남성’에 초점을 맞췄으며 시민은 전적으로 남성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루소의 생각은 이후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책 ‘국부론’에 생활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젠더 역할을 적용했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조용하면서도 결정적인 변화를 보였다. 그는 관점을 180도 바꿔 가계에서 등을 돌리고 자율적인 남성 개인을 무대 중심에 세웠다. 그는 그저 자신이 쓴 저작에서 가계와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묵묵히 경제 역사를 바꿨다. 애덤 스미스는 그때까지 ‘가정경제’ 또는 ‘가계관리’라는 의미로 부른 ‘오이코노미’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해 공적 영역의 생산성과 부를 다루는 ‘이코노미’와 분리했다. 그가 살아생전 출간한 두 권의 책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시장 법칙 맥락으로 가계를 대표하는 개인은 다름 아닌 ‘남성’이다. 다시 말해 그가 지칭하는 경제 행위 주체로서의 개인은 모두 ‘남성’을 일컫는다. 가정과 여성이 정치경제에서 배제되자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가계관리에 관한 문헌 대부분을 여성들이 쓰게 됐다. 가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의 전통적 초점이 유지되면서 이 경제 연구 분야는 경제학계 외부로 이끌렸다. 19세기 말까지 이 연구 중 일부는 ‘가정경제학(home economics)’으로 불리게 된 경제학 하위 분야로서 여성 학자들이 수행했다. 가정경제학은 미국에서 여성 학자가 경제학부 내에서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더 많은 여성이 경제학을 포함해 다양한 학문 분야에 진출하자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측정과 개념화 작업을 통해 ‘가사 노동’, ‘가계 생산’, ‘무임금 노동’, ‘돌봄 노동’의 가치와 역할을 이론화했다. 그들은 무임금 가계 생산에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임금 가계 생산의 역할과 젠더화한 특성 및 자본주의에서의 기능에 관한 가사 노동 노쟁을 초래하게 된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했다. 낸시 폴브레는 경제 모델, 특히 순환 흐름 모델에 가정에서의 무급 돌봄 노동을 포함하지 않은 신고전주의 주류 경제학 이론을 비판했다. 그녀는 가정이 생산 및 소비의 엄연한 주체인데도 가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경제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낸시 폴브레에 따르면 가정은 재화와 서비스 생산에 더해 노동자를 생산하지만, 이 생산에는 금액이 책정되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미래의 노동자인 자녀를 양육하는 것 외에도 노동자 생산은 긍정적 ‘외부 효과(externality)’를 생성한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의 관심사에서 밀려났던 가정경제가 다시 중심 무대로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과 주체성 그리고 재산권 고대의 크세노폰이 전문화를 가능케 한 첫 번째 분업으로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역할 분배를 자세히 논의했다면 체사레 베카리아와 안-로베르-자크 튀르고, 애덤 스미스는 부의 생산자인 남성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이 초기 정치경제학자들은 여성이 없는 학문적 환경 안에서 경제 개념과 이론 및 원칙을 수립하고 심화했다. 여성의 부재는 그저 우연이 아니라 경제학이라는 학문 기관 설계의 근본적 부분이었다. 유럽 전역의 대학들은 로마 가톨릭 수도원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는 주로 남성들이 성직자가 되도록 교육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경우 학생들이 캠퍼스 내에 거주하려면 독신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했다. 옥스퍼스대학교는 20세기까지 여성의 교내 접근을 금지했다. 프랑스의 살롱 문화와 유사하고 프랑스와 영국의 오래된 학술 모임을 모델로 한 경제 토론에 관심 있는 남성들은 스위스에서 ‘레이코노미스트(les économists, 경제학자들)’나 프랑스에서 ‘레필로조프(les philosophes, 철학자들)’ 같은 학회를 만들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도 ‘클럽(club)’이라는 이름을 단 모임들이 생겼다. 글래스고와 에든버러의 작고 붐비는 거주 구역 외부에 들어선 사교 공간에는 남성들로 가득했다. 이런 모임은 종류도 다양했고 회원이 지켜야 할 규칙도 엄격했다.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클럽들도 있었는데, ‘뒤죽박죽클럽(Hodge Podge Club)’, ‘돌발클럽(Accidental Club)’, ‘비프스테이크클럽(Beefsteak Club)’같은 곳들이었다. 하지만 남성들의 사교 모임이기에 “여성은 허용하지 않습니다.”가 규칙 중 하나였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서 살았던 애덤 스미스는 여성 참여를 불허한 ‘포커클럽(Poker Club)’같은 모임의 회원이었고 설립에도 관여했다. 입법가들, 학자들, 상인들 사이의 그 어떤 정치경제적 논의에도 여성들은 없었다. 여성의 경제 행위나 경제적 이해관계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그것이 경제 분야에 한계를 가져온다는 생각 또한 누구도 하지 않았다. 재산권: 경제 제도로서의 결혼 1700년대에 재산권이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남성의 독점적 권리로 규정되면서 여성 및 식민지 원주민은 자본이나 토지 같은 자산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결혼법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법은 인구 문제와 직접 관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은 대부분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계약이었으며, 자산과 소득 같은 경제적 안정성을 결정했다. 다른 유럽 국가와 비교할 때 잉글랜드는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과거에는 인정됐던 기혼 여성의 재산권이 가장 극단적으로 상실된 곳이었다.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여성은 거의 모든 법적 권리를 잃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결혼은 마음의 문제일 수 있지만, 당시 귀족과 부유한 가문 사람들에게 결혼은 언제나 재산을 대가로 가족이 되는 교환의 문제였다. 대부분 가문에게 자녀의 결혼은 사회적·정치적 인맥의 확대 및 강화이자 전쟁을 방지하는 현명한 대안이었다. 이 시대 여성 경제 저술가들은 결혼법과 그것의 경제적·물리적 영향 등 결혼이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이는 결혼을 그저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한 남성 경제학자들과 극명히 대조된다. 더욱이 남성 경제학자들은 결혼이 가계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 자녀 사이, 세대 사이의 자원 분배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결혼을 경제적 제도보다는 사회적 제도로 여겼다. 결혼은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의 법적 주체성을 포기하기로 합의한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일반적인 계약과는 다른 법적 계약이었다. 따라서 이 계약은 법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잉글랜드 철학자 해리엇 테일러 밀(Harriet Taylor Mill, 1807~1858)은 1851년 논문 ‘여성의 참정권’에서 결혼의 법률적 근거를 제기했다. 이 논문은 처음에 그녀의 남편 존 스튜어트 밀 이름으로 발표됐으나 이후 해리엇 테일러 밀 자신이 쓴 것으로 기록됐다. 해리엇 테일러 밀이 1850년 10월 2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열린 최초의 ‘여성권리대회’ 연설을 토대로 쓴 ‘여성의 참정권’은 존 스튜어트 밀이 내용을 보강해 그녀 사후 11년 뒤인 1869년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이 책은 한 성별이 다른 성별에 종속된다는 법률적 원칙 자체가 잘못이며 인류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임을 역설하고 있다. 해리엇 테일러 밀과 존 스튜어트 밀은 이 종속 원칙을 완전한 평등 원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3년 펴낸 ‘자서전’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종속’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정치경제학 분야 교과서로 널리 읽힌 ‘정치경제의 원리(1848)를 비롯해 자신이 쓴 저서 대다수가 아내 해리엇 테일러 밀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영국에서는 기혼 여성의 권리가 다소 향상됐다. 바버라 리 스미스 보디촌(Barbara Leigh Smith Bodichon, 1827~1891)과 ‘랭엄플레이스그룹(Langham Place Group)’이 1857년 기혼 여성의 재산권 확보 법안을 제출하고자 투쟁했고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870년까지 의회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이 법안은 기혼 여성이 남편의 승인 없이도 “자신의 의지 또는 기타 적법한 방식으로 재산을 취득하고 보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담고 있었다. 결혼법과 기혼 여성 재산권에 대한 이 같은 변화는 기술 발전과 더불어 여성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열어줬다. 그렇지만 20세기가 될 때까지 기혼 여성에게는 여전히 독립적으로 계약을 체결할 권리가 없었다. 남편의 공동 서명이 있어야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계약 책임이 전적으로 여성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1953년 독일 1957년 네덜란드, 1958년 벨기에, 1965년 프랑스에서 여성의 법적·계약적 지위를 제한하는 법률이 개정되는 동안에도 미국은 2006년까지 의회에서 ‘기혼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미 미국 대다수 주 정부가 기혼 여성이 서명한 계약을 인정하고 있었다. 반면 가정은 여전히 법률적으로 사적 영역이었고,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결혼 생활 속에서의 폭력과 강간은 20세기까지 사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한편으로 경제학에서는 남성을 가장으로 하는 소득 가구 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1960년대 초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 증가는 놀랍고 이례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와 여성의 관계: 자본, 돈, 금융 여성에게 강요된 돈을 대하는 태도 1700년대와 1800년대 여성들은 자본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새로운 부르주아 도덕의 개념에서는 하층 여성들만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하기 때문에 중상류층 여성이 돈을 다루는 것을 ‘여성답지 않고’ 저속한 행위로 치부했다. 가계 생계를 위한 가내 수공업이 산업화 과정에서 대규모 작업장과 공장으로 이동함에 따라 자산의 금전적 가치가 점점 더 중요해졌고, 중산층 여성들은 자산과 재정에 대해 이중적 관점, 즉 돈은 중요한 것이지만 여성이 다룰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유지하도록 세뇌당했다. 마리아 에지워스와 아버지 리처드 로벨 에지워스가 함께 쓴 ‘현실적 교육’의 한 장인 ‘검약과 경제(Prudence and Economy)’는 가정에서의 경제적 행동을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은 독자인 부모들에게 다양한 이유를 들어 아들보다 딸을 더 주의 깊게 가르쳐야 한다고 독려했다. 이들이 보기에 “경제는 여성에게 더 본질적인 가정의 미덕”이었다. 에지워스 부녀에 따르면 가정의 맥락에서 경제는 검약, 경험, 재화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술, 낭비 최소화 같은 요소로 구성된 것이었다. 자녀에게 돈의 소중함을 가르치려는 부모의 노력은 아이들 스스로 하는 용돈 관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젊은 여성들은 가계부를 관리하는 데 익숙해야 하며 모든 필수품과 사치품의 가격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물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 ‘정확한 자산 현황 파악’, ‘내 것에 대한 집착보다 우선하는 타인의 재산권 존중’ 같은 태도 강요는 젊은 여성이 부모의 집을 떠나 다른 남성의 아내가 됐을 때 똑같은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돈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는 여성은 타인의 자산을 관리하는 존재일 뿐, 스스로 자본을 운용하거나 소득을 끌어내는 존재는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동시에 결국은 자기 것이 아닌 돈을 아껴 쓰는 것이 여성과 소녀들의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여성을 돈에서 떨어뜨리고 노동력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도록 사상적으로 지원하는 일련의 규범과 가치는 19세기 후반까지 일반적인 개념이었다. 사실상 오늘날에도 대다수 젊은 이성애자 여성들의 경우 배우자가 될지 모를 남성과 일, 시간, 수입 분리 등을 논의하는 일은 연인 사이의 로맨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여성의 삶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 부분을 미리 논의해 합의를 이뤄놓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를 거부하는 남성과는 장기적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다. 자본과 돈의 통제권을 경시하고 낭만적으로만 접근하는 결혼 생활은 여성에게 대부분 불리하게 작용하며 크나큰 상처를 입힌다. 분배 젠더와 인종별 임금 격차 설명 20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서구, 특히 미국은 소득 불평등 심화를 혹독히 경험했다. 젠더별 임금 격차는 감소했으나 백인 위주였다. 유색 인종은 여전히 인종별 임금 격차가 30~50퍼센트 수준을 유지했고 흑인의 경우 그 차이가 더 두드러졌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게 노동은 재화와 서비스 생산에 사용하는 상품으로 정의됐다. 이는 모든 노동이 본질에서 같으며 노동이라는 상품이 포함하는 인적 자본 수준, 즉 교육이나 기술이나 경험에서만 차이가 있음을 의미했다. 과거 정치경제학자들의 추론대로 노동자에게 생계 기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밀려났고, 이 새로운 사고의 틀에서는 노동자가 한계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인식됐다. 기나긴 역사적·경제적 억압과 배제에 근거를 둔 노동 임금의 젠더별·인종별 격차에 대한 분석은 이제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이해됐으며, 이들의 임금 격차는 생산성과 노동 수요 사이의 차이로 축소됐다. 낮은 임금은 낮은 생산성 또는 제공되는 재화 및 서비스의 낮은 가치를 의미한다는 스미스 웹과 프랜시스 Y. 에지워스의 관점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 인과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여성 경제저술가들의 견해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의 분석은 정확히 이 지점을 지적했다. 여성과 유색인종이 장기간에 걸쳐 고임금 일자리에서 배제됐고, 임금·무임금 농업과 가사 노동, 그리고 육아, 청소, 간호(간병), 교육 등 노동을 화폐화·시장화한 분야에서 여성의 대표성이 과도하게 부각했다는 사실은, 합리화된 모성 숭배나 직업 훈련 기회 부족 같은 다른 차별 요인과 더불어 젠더별·인종별 임금 격차의 주된 원인으로 드러났다. 젠더별 임금 격차에 대한 설명은 이제 노동자의 ‘인적 자본’에 집중했다. 노동자의 인적 자본은 주로 교육을 통해 향상했다. 그래서 교육은 훗날 더 높은 소득이 보상해줄 투자로 여겨졌다. 나아가 경제학자들은 교육 및 훈련에 따른 기술과 노동 기간에 따른 경험 즉, 숙련도 수준을 기반으로 한 인적 자본 개념을 대입해 여성과 남성 사이 그리고 인종·민족 사이의 임금 격차를 설명했다. 신고전주의 경제 이론의 틀 안에서 활동하는 경제학자들은 자녀 수와 직접 육아 여부 등의 변수를 끌어들여 젠더별 임금 격차에 대한 설명을 보완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7~12퍼센트의 젠더별 임금 격차는 ‘차별’이라는 꼬리표 아래 사회학 연구로 밀려나 그 자세한 연구가 사회학자들에게 맡겨졌다. 최근에는 젠더별·인종별 임금 격차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기업의 구별 짓기 문화, 차별적 정책, 여성 노동 지원 부족, 이중 노동 시장 등 정책적·제도적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두하고 있다. 일터를 둘러싼 규범과 규정을 접한 많은 여성 경제 저술가와 경제학자 및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 특히 유색인종 경제학자들은 젠더별·인종별·계급별 임금이 권력 메커니즘, 착취, 차별, 직업 분리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앞으로의 경제학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여성 경제 저술가들과 경제학자들은 현실이라는 무대 한복판에서 소녀와 여성, 활동가와 대중을 위해 글을 썼다. 반면 정치경제학자들은 주로 입법자, 정부, 기업가, 그리고 다른 경제학자들을 위해 썼다. 이는 여성과 남성 경제학자 모두의 언어, 개념,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전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국가 권력자들은 남성 중심적 시각의 한계에서 비롯된 경제학의 일방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성의 관점을 취하면 경제 발전의 다른 역사, 남성 중심 경제적 사고방식의 문제점, 경제학에서 간과한 여러 측면을 파악할 수 있다. 여성이 경제에서 배제된 역사는 수 세기는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이어졌기 때문에, 여성의 삶을 크게 좌우하고 정치경제학과 이후 경제학에서 여성을 배제하게 된 요인으로 여성 경제 저술가들이 젠더 문제를 지적한 것은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들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제도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남성과 여성이 다루는 주제 역시 그 차이가 크게 줄었으나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반쪽짜리 경제학의 좁은 터널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최근 유색인종 여성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자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 직면하는 어려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급진적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자 그룹은 국제페미니스트경제학협회와 전미경제학회 회원들에게 여전히 현장에서 자행되는 젠더차별과 인종차별을 인지하고 이에 대응하는 정책을 촉구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다양성이 객관성을 더 높이고 ‘터널 시야(tunnel vision)’가 객관적 지식 생산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려면 경제학자들의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기득권 사회의 경제적 이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류 경제학의 뿌리 깊은 지배력은 그 자체로 더 광범위한 이론적 변화를 막는 보루를 형성해왔다. 경제학계 변화에 별 관심이 없거나 엮이기 싫은 경제학자들은 뉴이코노믹씽킹(New Economic Thinking)이나 리씽킹이코노믹스(Rethinking Economics)와 같은 연구 기관을 학계 외부에 조직했다. 지구 온난화, 전염병, 권위주의 경향, 대규모 이민 등 현재의 위기 앞에 경제학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는 경제 시스템의 신속하고 근본적인 변화, 즉 주류 경제학이 다루기에 준비가 부족한 변화를 예상하고 해결할 필요성이 있음을 뜻한다. 물론 주류 경제학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광범위한 주제에 적용하고 관련 연구를 흡수하면서 덩치를 계속 키우는 ‘다원적 경제학 접근법(pluralist approach to economics)’을 확대하면서 기존 경로를 유지하려 들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쁘지 않다. 여성과 유색인종 문제와 관련해 젠더 및 가족 경제학 분야에서 하는 것처럼 임금 격차, 실업, 차별 등의 문제를 신고적주의적 연구로 끌어오면 된다. 그래도 더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젠더, 인종, 계급, 지위 및 자연과의 관계가 경제와 경제사상 발전에 공헌한 역사를 명확히 직시하고 경제와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장려할 때 이를 포함하는 것이다. 모든 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원의 공급, 구성, 효율적 사용을 다루는 방식을 설명할 때 이와 같은 경제 개념, 이론, 내용, 역할로는 우리의 관점을 제한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 순간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신들의 분야는 물론 그 이상을 발판으로 경제 분야 연구와 토론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특히 젠더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 성 소수자 문제, 글로벌 불평등, 지속 가능 개발 등 세계를 구성하는 것과 관련 있는 모든 사회운동과 지식의 흐름 및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지치지 않는 열정과 의지가 케케묵은 문제와 전례가 없던 문제에 대한 더 나은 해답을 찾고 이를 사실과 과학적 분석, 그리고 건전한 토론의 장으로 이끄는 힘이 될 것이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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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물들과 생명들이 겪는 좌충우돌 이야기 송진 | 2022년07월 | 168쪽 |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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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물들과 생명들이 겪는 좌충우돌 이야기를 시로 녹이다 때로는 종일 놀고 싶지만 시간이 없거나 돈이 없고 힘내라, 힘! 그래서 힘내고 싶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만 봐야하는 무기력함에 죄책감마저 느낀다. 먹고 살기 위해 고된 일상을 겨우 마무리하고 어깨 축 늘어뜨리고 반지하 원룸으로 돌아가는 지구에 사는 호흡자들, 그래도 우리는 날마다 낭만을 꿈꾼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태양과 초록풀과 연둣빛 동박새와 주인에게 귀엽게 뛰어가는 개와 고양이가 있는 지구는 킹콩처럼 무섭기도 하지만 새벽이슬처럼 촉촉하고 아름다운 영원한 피난처일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말해주고 있다. ■ 저자 송진 송진 시인은 1999년 이승훈 등 심사로 『다층』 제1회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지옥에 다녀오다』 『나만 몰랐나봐』 『시체 분류법』 『미장센』 『복숭앗빛 복숭아』 『방금 육체를 마친 얼굴처럼』 이 있다. ■ 차례 1부 이상한 피카츄 이상한 피카츄 드뎌 왕콘치 고고 꼬부기 플로깅plogging 쁌쁌 레쿠쟈 버베나 하스타타 초승달 춘분春分 종일 놀아 종일 놀아 2 힘 문학의 집 서울 3월 31일 미망 찔레꽃 초파리 셋째 날 공空 2부 4월이란 발 혹은 별 3월 호흡 호흡 2 20220403 - 제주 4.3 민주항쟁 4월 3일 쌀 쌀봄 청명淸明 한식寒食 벚꽃과 된장찌개 꽃잎취격 창틀에 꽃잎 4월이란 발 혹은 별 체리 블러썸 cherry blossom 이가시다시이가시 - 자개농 안에서? 이가시다시이가시 - 자개농 안에서⑥ 3부 미영 소정 마을 미영 곡우穀雨 - 20220420 파우징 수업 닿다 태양은 모든 걸 보고 있다 파랑 스푼 파랑 스푼 2 영주 봄비 폭우 손가락 이팝나무 버스에서 내려서 걷다 입하春分 - 20220505 나는 재기 발랄해 4부 날씨의 잇몸 날씨의 잇몸 보리밥 쌈밥집 새라 파닥! - 하안거 크림애플파이 보리 게스트하우스 이가시다시이가시 - 자개농 안에서① 이가시다시이가시 - 자개농 안에서② 이가시다시이가시 - 자개농 안에서③ 이가시다시이가시 - 자개농 안에서④ 줄 버찌 등불 실거베라 6월의 바람 녹야 송진 | 2022년07월 | 168쪽 | 9900원 플로깅(plogging) 1부. 이상한 피카츄 이상한 피카츄 푸른 바다 위 용맹스럽게 날아가는 피카츄 창과 방패는 구름과 달 카레라이스 저녁 같은 밤이 오면 비벼 먹고 싶은 가족들이 자율 생성된다 배고픈 이상한 피카츄 배부른 이상한 피카츄 이상한 꽃나무 이상한 피카츄 산수유꽃 불꽃처럼 터지네 플로깅* plogging * 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운동 쓰레기를 주우면서 걸어 걸으면서 쓰레기를 산책해 발끝마다 발광 순백으로 빛나는 지구 맑은 눈동자 윙크! 잉크이크윙크워커워킹하이킹사이클링 놀자 놀자 걸으면서 쓰레기야 나랑 산책해 목련 햇살은 빛나고 지구는 토닥토닥 위로 받는다 2부 4월이란 발 혹은 별 한식 寒食 찬밥을 먹는다 추운 바깥을 돌아다닌다 따듯한 무덤가에서 잠들다 엄마 - 엄마 - 아빠도 죽었는데 늘 엄마만 부른다 4월이란 발 혹은 별 강아지들이 꽃눈 맞고 있다 발이 네 개다 꼬리가 한 개다 멍멍 짖기도 하고 짖지 않기로 하기도 한다 그들의 혀는 연한 분홍빛 그들의 귀안은 진한 분홍빛 그들의 피는 붉다 3부 미영 미영 알아요 오늘 알아요 내일 곪은 몸은 알아요 곪은 정신은 몰라요 몸 따라 봄 가고 있어요 알아요 어제의 알약 알아요 손사래치는 미영 이제 그만.. 그만요 이제 봄은 제 몸을 알아요 앓고 난 뒤에 환해진 하늘 앓고 난 뒤에 환해진 빈자리 꽃산딸나무 황칠나무 다 우리 동네에 살아요 환하고 예뻐요 35 사랑하는 나날 사랑하는 나날이 흘러간다 이팝은 꽃을 피워 한밤중에 불쑥 선물한다 이봐 이팝! 고맙다구! 눈물겹게 고마우면 어떻게 해야 하지 포옹이라도 해야 하나 39번 시내버스 안에 나밖에 없는데 안내방송이 크게 나온다 브라보 주유소를 지난다 브라보! 휴먼시아를 지난다 휴먼! 버스 파업이 가까스로 새벽 4시에 해결되다 사실 이 이야기는 4월 25일 쓰여질 이야기들이다 4부 날씨의 잇몸 줄 107.7mhz 주파수를 맞추고 창을 열었는데 장산 줄기 오봉산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다 까치 두 마리 날고 오묘한 등불 같은 연분홍빛 버찌 우뚝 서 있다 벚나무 무성한 잎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저절로 빛나는 것이다 저절로 보이는 것이다 저절로 알려지는 것이다 자신의 할 일을 잘하고 있으면 누가 봐도 봐주는 것이다 등불 연분홍빛 버찌가 사라졌다 연둣빛 새가 다녀간 뒤에 방충망은 알아차렸다 버찌도 새도 방충망도 등불이라는 것을 해는 질주한다 고요한 죽음처럼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