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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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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음반・DVD

빈틈의 온기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
윤고은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05월 | 340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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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지음/흐름출판/2021년 5월/340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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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마스크 없이 어떤 곳에도 도달할 수 없는, 참으로 이상한 시절!

그럼에도 이 삶을, 타인들을, 이 세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 책 《빈틈의 온기》는 윤고은 작가가 소설가로 데뷔한 후 펴내는 첫 번째 산문집이다. 23살의 나이에 소설가가 되었고, 4권의 소설집과 3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는 동안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데뷔 이후 재난 여행 상품을 파는 여행사(《밤의 여행자들》), 달로 이주하려는 무중력자들(《무중력증후군》), 마당에 유해 폐기물이 묻힌 어느 가족(《해적판을 타고》) 등 놀라운 미증유의 세계를 선보여 온 윤고은 작가이지만, 이번 에세이집 《빈틈의 온기》에는 순도 100퍼센트, 작가의 진짜 일상의 모습을 담아냈다.

 

한 사람의 생애는 무수한 사람들과의 무수한 인연들(기억되거나 혹은 기억되지 못하더라도)로 만들어진다. 그 하나하나의 생이 모여 이 세계를 만들어왔고, 만들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윤고은 작가는 그 하나의 생을 특별하고 귀하게 받아들인다. 소소한 순간을, 누군가에게는 보잘 것 없을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을, 그래서 그녀는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작은 빈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작은 햇살도 마찬가지로 따뜻하다고. 행복이라는 건 특별한 게 아니라고.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나 있다고. 윤고은 작가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저자 윤고은

소설가. 라디오 디제이. 여행자. 지하철 승객. 매일 5분 자전거 라이더. 길에 떨어진 머리끈을 발견하면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 사람. 책이 산책의 줄임말이라고 믿는 사람.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과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과 《밤의 여행자들》, 《해적판을 타고》를 썼다. 라디오 〈윤고은의 EBS 북카페〉를 진행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남대서양의 펭귄들

 

1 빈틈을 키우고 있습니다

시럽과 폴리덴트 ∥ 인터스텔라 ∥ 등은 밀수록 좋아 ∥ 오래된 물건과 이별하는 법 ∥ 소매에 대하여 ∥ 올해의 오타상 ∥ 경찰서 뷰의 카페 ∥ 주말의 자전거 ∥ 턴 다운 서비스 ∥ 충전 스트레스 ∥ 반려폰 ∥ 지각자들의 연대 ∥ 인베이더그래픽 ∥ 해방촌 박소아과

 

2 출근길, 일단 타고 봅니다

동그랗고 파란 점 ∥ 알람은 화재경보기 ∥ 고강도 10분 ∥ 출근길 크로키의 시작 ∥ 상상력은 위대하다 ∥ 축지법이 별건가요 ∥ 몇 초간의 황홀한 우연 ∥ 지하철의 꽃, 환승 ∥ 평일의 자전거 ∥ 선로를 타고 오는 ∥ 지하철이 무대라면 ∥ 치타와 달팽이 ∥ 코로나 시대의 궤적 ∥ 굴절미 ∥ 월요일의 열차 ∥ 열차가 아니라 필름

 

3 그 여행의 기념품은 빈틈입니다

압도적인 식전빵 ∥ 거의 모든 사이즈 ∥ 각인의 힘 ∥ 여행가방 ∥ 손님이 남긴 것 ∥ 노래는 공기를 바꾼다 ∥ 엽서의 미학 ∥ 아침 7시의 리처드 기어 ∥ 두려움의 2 in 1 ∥ 바람의 궤적 ∥ 시간을 만지는 재미 ∥ 공항이라는 나라 ∥ 산책의 이유 ∥ 동작동 산오징어

 

4 빈틈을 기록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그 책의 제목은 ∥ 상냥한 취객 ∥ 1:1의 산책을 위한 안내도 ∥ 집이라는 앨범 ∥ 첫 지하철 ∥ 크리스마스트리 ∥ 숙제와 거짓말 ∥ 각종 행사 전문 ∥ 청첩장의 유효기간 ∥ 구명튜브 ∥ 봄의 세입자 ∥ 표류하는 책섬 ∥ 이름을 모르는 사이 ∥ 북반구의 남십자성 ∥ 오늘도 살랑

 

에필로그: 작가의 말을 쓰는 밤과 내일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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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지음/흐름출판/2021년 5월/340쪽/15,000원

 

빈틈을 키우고 있습니다

시럽과 폴리덴트

이틀 연속 같은 카페에 갔는데 내가 손소독제인 줄 알았던 그것이 시럽이었다는 걸 하루 지나서야 깨달았다. 아니, 누가 봐도 손소독제처럼 보였단 말이지. 방금 L도 시럽을 손에 바를 뻔했다고 하지 않았나? 저만치 보이는 다른 사람은 그걸 손에 뿌리다가 흠칫 놀라는 단계까지 갔다. 나는 거기서 몇 단계 더 흘러갔다. 심지어 그게 어제 일이다. 조금 전에 L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전날 그걸 냅킨에 묻혀서 테이블 위를 닦았을 때 너무 찐득해서 이상했던 게 떠올랐다. 다른 손소독제와 달리 본드처럼 끈적거리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곳이 병원 내부에 있는 카페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이곳의 손소독제는 더 농축되어 있구나, 그렇게.

 

사실 이런 일은 좀 흔하다. 워낙 A와 B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새로울 것도 없다. 이런 경험 중에 가장 강렬한 건 역시 폴리덴트 사건이다.

 

어느 라이브 행사의 사회를 보기로 한 날이었는데 그날 내내 시간에 쫓겼다. 일산에서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카페에서 잠깐 숨을 돌린 다음 바로 합정으로 건너갔다. 양치질을 하고 싶었는데 늘 휴대하던 치약이 가방 안에 보이지 않았다. (사건은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근처에 약국이 보이길래 얼른 들어가 매대 위에 놓인 치약을 냉큼 집어 들었다. 이 모든 걸 정말 빠른 속도로 해냈다. 그리고 약국 옆 화장실로 가서 의심없이 양치질을 시작했다.

 

치약 맛이 뭐 이래..., 했지만 상자에 ‘내추럴 무향’이라고 적혀 있었고 나는 내추럴 무향을 믿어보기로 했다. 치약값이 8천 원이나 되었으니 아무래도 좋은 거 아니겠는가. 그러나 입 안은 점점 이상해졌다. 맛이나 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치약을 확인하니 ‘접착력’이라는 글자가 보이네? 치약에 접착력이 필요한가? 그 옆엔 ‘틀니 고정 강화’라고 적혀 있고 ‘의치부착제’와 ‘폴리덴트’라고도 적혀 있었다. 치약이 아니었다. 이런 말들이 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인가! (사건은 늘 이런 단계를 거친다.) 치약을 칫솔 위에 너무 많이 짜지 말라고 하는 건 그것이 치약이 아닐 가능성을 고려한 말일지도 모른다. 혀가 빳빳하게 고정되는 느낌에 놀라서 얼른 물로 의치부착제를 씻어냈지만 잘되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데, 시간이 없는데! 이미 입 안에 들어찬 의치부착제를 덜어내기 위해 다시 그 약국으로 가서 치약을 사야 했다.

 

폴리덴트 소동을 겪었지만 나는 시간 안에 행사장에 도착했고, 그땐 다행히 내 입 안의 모든 것이 너무 고정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기분만큼은 폴리덴트, 그 의치부착제로부터 아지 멀리 가진 못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오늘 조금 더 단단하게 고정된 치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기구한 사연을 듣고 그 자리의 모두가 웃었고, 나는 그게 폴리덴트와 내 인연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수상한 물건은 다음날 출근길까지 따라왔다. 치약인 척, 진짜 치약을 밀어내고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내가 빼두는 걸 잊은 거겠지만 기분은 내 탓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떤 기억은 밤에 적당히 휘발되기도 하는데 출근길 열차 안에서 손으로 만져질 정도면 이제 완전히 잊긴 그른 것이다.

 

이상하게도 내가 TV를 볼 때마다 폴리덴트 광고가 나온다. 이 질긴 것이 아직도 부착시키고 싶은 게 남았는지 나를 자꾸 따라온다. 폴리덴트는 내 서재의 미술 코너 앞에 치약이 아니면 물감이라도 된다는 모양새로 음험하게 숨어 있다가 얼마 전에야 드디어 버려졌다. 내겐 필요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분명히 버렸다. 버렸는데 또 어디선가 나타난다면 그땐 정말 인연이겠지.

 

앗)

인연인가 보오. 분명 버린 줄 알았는데...  

 

출근길, 일단 타고 봅니다

굴절미

지하철 노선마다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다고 해도 대체로 동의하게 되는 멋진 구간들 말이다. 대부분 지하보다는 지상일 테고 오직 지하철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을 꾸준히 타는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구파발역에서 지축역 사이 구간이 최고라고 대답하겠다. 햇빛이 열차 안으로 쏟아지고 파노라마처럼 북한산과 그 아래 풍경이 펼쳐지는데 내가 타고 있는 게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진 열차라 해도 믿을 정도다. 매일 철로 위를 흘러가면서 보는 이 몇 초간의 전망 때문에 나는 중간에 앉아 있는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양재역에서 대화행 열차를 탈 때는 대체로 오른쪽 자리를 선호하는데 한강 통과 구간에서 입체적인 전망을 보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열차가 구파발역에 닿기 전에 왼쪽 자리로 옮긴다. 3호선 최고로 아름다운 구간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양재역에서 3호선에 올라타 주엽역까지 가는 동안 내가 번잡한 기분으로 통과하는 구간도 있고 마음은 바쁘지만 살짝 낭만적인 심정이 되어 통과하는 구간도 있는데 구파발역에서 지축역 사이, 이 구간을 통과할 때 내가 하는 생각들은 이렇다. 목적지가 있어서 지하철에 올라탄 사람들은 이미 다 내린 거야. 지금 이 열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뭐 어디로 가나 상관없는 나그네들인 거지. 남는 게 시간이고 관찰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봅시다. 물론 내 멋대로 해보는 상상일 뿐이지만.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도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햇빛이 열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 천장의 삼각형 손잡이들이 일제히 흔들리고, 손잡이가 리드미컬하게 찰랑찰랑 흔들리는 걸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꼭 아기 머리 위에 매달아두는 모빌처럼 느껴진다. 일순간 아기가 된 기분으로 지하철을 요람처럼 누리면서 출근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출근길에는 이 구간이 유독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햇빛이나 이 일대 풍경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굴절에 있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됐다. 지상으로 올라오고서 열차가 몸을 살짝 비틀기 때문이다. 뭐, 지금까지 직선으로만 달려온 건 아니겠지만 바로 이 구간, 구파발역과 지축역 사이에서는 확실히 느껴진다. 굴절의 미학이랄까.

 

날 홀린 굴절미... ‘굴절미’라는 단어를 쓰나 싶어서 검색을 해 봤더니 굴절미는 나오지 않고 웬 꿀절미만 휴대폰 화면 가득 등장한다. 잘못 입력한 것도 아닌데 굴절미보다는 꿀절미를 찾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거겠지. 화면에는 ‘꿀절미’로 검색한 결과라며 ‘굴절미’를 여전히 원하느냐고, 원하면 찾긴 찾아보겠다는 뉘앙스의 문장이 달려 있다. 이미 그 문장은 아는 것이다. 굴절미를 찾던 사람 하나가 이미 꿀절미 검색 결과에 홀려 그걸 열심히 보고 있을 거란 걸. 예상은 적중해서 나는 꿀과 인절미의 조합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읽고 있다. 주문하기 직전이다. 이것 역시 휘어짐, 틀어짐, 예기치 않은 굴절의 미학인 것만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 여행의 기념품은 빈틈입니다

압도적인 식전빵

“그 집 진짜 별로야. 거기만은 가지 마라.”

“거기서 가방 도둑맞았다. 거기만은 가지 마라.”

 

Z의 여행담은 꽤 냉담한 편이다. 그렇기에 Z를 감동시킨 여행지는 더 위대해지는 것이다. Z의 여행담을 통해 적당히 차분해진 나는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도 하니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다. 확실히 기대와 감동이 늘 비례하는 건 아니다. 무구한 기대와 촘촘한 계획이 나를 흡족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 반대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여행을 부추길 만큼 강렬했던 사진 한 장이나 소문이 막상 여행을 시작하고 보면 미끼 정도였음을 확인할 때도 있다. 진짜는 따로 있는 것이다.

 

이건 스테이크로 유명한 식당에 갔다가 식전빵에 엄청난 감동을 느끼고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우리는 자주 식전빵에 매료된다. 때로는 메인 메뉴보다도 더. 조약돌 모양의 식전빵을 내어주는 식당 한 곳을 알고 있는데, 그 식당에 가본 사람은 다 이해할 것이다. 식전빵에 홀린 나머지 주문할 메뉴가 나오지도 전에 이미 몸과 마음을 식전빵에 내어주게 된다. 그 빵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자 식당에서 한 봉지 가득 챙겨주기까지 했기 때문에 정작 메인 메뉴는 식전빵과 식후 빵 사이에 살짝 끼인 존재가 되었다.

 

있는 줄도 몰랐거나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여행을 통째로 삼키는 경우가 꽤 있고 우리는 그런 경험을 잘 잊지 못한다. 예열 단계에서,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그 틈새에 우리를 홀리는 식전빵 때문에 다음 일정을 취소한 적도 있으니까. 그런 것들의 목록을 나열하라면 책 한권이 될 것이다. 이런 목록은 의외여서 좋다. 기대를 품지 않았던 것이라 좋고, 만만한데 아주 얕볼 수는 없어서 좋다.

 

공항이라는 나라

밤의 공항을 좋아한다. 긴 여정을 끝내고 한밤중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오래 부유하다가 마침내 바닥에 안착한 먼지 한 톨이 된 기분인데 그게 나쁘지 않다. 낮의 공항이 발산형이라면 밤의 공항은 수렴형에 가깝다. 여행자의 에너지가 밤 공항의 노련한 피로 속으로 차분하게 스며든다.

 

짐을 찾고 공항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의 가로등은 유독 커서 달과 헷갈리는데, 어쩌면 가로등이 큰 게 아니라 그 길목의 달이 유독 작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둥글고 밝은 것들에 둘러싸여 달리는 길, 그중에 어떤 것이 진짜 달인지 헤매는 과정은 여정의 끝에 붙은 보너스 게임이다.

 

밤의 공항에 내려앉는 것도 좋지만 밤의 공항을 발판으로 삼아 낯선 곳으로 점프를 시도하는 것도 좋다. 사람들마다 선호하는 비행 스케줄이 있을 텐데 내게는 자정쯤 출발하는 비행기가 최고다. 물론 적어도 몇 시간 날아간다는 전제 하에 고른 것이다. 공항에 밤 아홉 시 정도에만 도착해도 충분하니 낮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떠나기에도 부담이 없고, 자는 시간에 이동하니 결과적으로는 여행을 하루 앞당겨 시작하는 셈이다. 시간과 관련된 것이야말로 득템 중 득템 아닌가. 게다가 밤의 공항은 썰물 때의 바닷가처럼 한적하고 헐렁하다.

 

코로나가 끝나면 밤의 인천공항을 지나 어디론가 날아가야지. 비행기가 낯선 곳에 닿았을 때 그곳은 첫 차가 다닐 무렵이었으면 좋겠다. 여행은 밤과 낮을 뒤집는 요술쟁이라 시간 계산을 잘해야겠지만, 밤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낯선 곳의 아침에 닿는 기분도 꽤 근사하니까. 그곳의 속도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하고, 한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아직 문을 열기 전이지만 불빛과 냄새가 새어 나오는 빵집, 텅 빈 골목을 누비는 청소차. 팔꿈치를 야무지게 접고 가볍게 뛰는 사람,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는 사람, 어느 골목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커피 향, 반질반질한 돌바닥의 윤기, 그 위로 지나가는 내 흔적들까지. 나는 그 낯선 도시가 아침 9시를 맞기 전에 도착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이동한다. 운이 좋으면 숙소에 바로 입실할 수도 있다. 운이 특별히 좋지 않아도 가방은 맡겨둘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홀가분한 몸이 되어 아까 그 커피향 속으로 돌진할 수 있다.

 

사실 공항엔 그냥 가서 앉아만 있어도 좋다. 떠나거나 기다리거나 하지 않아도, 공항이 유일한 목적지가 되는 셈이다. 스크린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정보들을 보고 있노라면 굳이 활주로가 보이는 곳으로 가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비행기들이 이 시간 어디로 뻗어나가는지 알 수 있다. 이 스크린은 간단한 음식 재료가 적힌 거대한 메뉴판 혹은 책의 목차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번은 작정하고 인천공항 안의 모든 시설을 기웃거린 적이 있다. 일 때문이었는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신발 뒷굽이 떨어져 나가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그걸 고치기 위해 찾아간 공항 지하의 수선집에서 ‘오늘의 손님’이 되는 영예를 누린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사장님은 매일 특이한 손님에 대해 기록하는 분이었는데 그날 내가 제일 특이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걸어 나왔을 때 공항은 이미 어둑어둑, 밤이었다. 나는 물 빠진 해변 같던 공항을 떠나 둥근 가로등과 둥근 달 속으로 흘러갔다.

 

공항에는 둥글고 사랑스러운 것이 하나 더 있다. 공항에 세워져 있는 원형시계. 친구의 아들은 한때 그것과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 당시 네 살이었던 아이는 이제 열 살이 넘었다. 인천공항을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믿었던 걸 그 아이는 기억할까? 여름용 밀짚모자와 겨울 패딩이 나란히 앉아 있는 나라, 몸보다 더 큰 가방을 끌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 매일 수많은 안녕이 오가는 나라, 밤이 오면 쓸쓸하고 아름다워지는 나라. 

 

빈틈을 기록합니다

집이라는 앨범

며칠 전 라디오에서 집에 관한 책을 소개하게 됐다. 어떤 방향으로든 집 이야기를 꺼내면 카페인들도 나도 말이 많아진다. 음악이 나가는 사이에 선곡표에 적어본 바에 따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머문 집이 모두 열한 곳이었다. 3분이 넘는 음악은 금세 흘러갔고 다시 마이크가 켜졌다. 나는 방금 알게 된 사실을 말했다. 내가 41년간 모두 열한 곳의 집을 거쳤다고, 우리가 살았던 집들을 한번 세어보자고. 그리고 라디오로 들어오는 사연을 하나둘 읽다가 깨달았다. 방금 내가 역사 속에서 집 하나를 누락했다는 사실을. 고의가 아니었으니 얼른 정정했다. 41년간 모두 열두 곳의 집이라고.

 

그날 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또 하나의 집이 떠올랐다. 실수로 쏟은 팝콘 봉지도 아닌데 왜 이리 뒤늦게 주워야 할 집이 많단 말인가. 그런데 막 생각난 그 집을 내 역사에 편입시켜야 할지 말지를 두고 나는 좀 고민해야 했다.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40일간 머물렀던 임시거처였기 때문이다. 단기 임대했던 공간을 내가 살았던 집으로 본다면 나는 41년간 모두 열두 곳에서 살아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열셋과 열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을 두고 나는 L과 상의까지 했다. 정확히 말하면 상의라기보다는 또 다른 수다의 시작이었다. 집이란 수다의 풍성한 재료가 되고 사람들은 늘 집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거기서 사진 한 장 찍은 게 없잖아? 그래서 집이란 느낌이 안 드는 건가?”

 

내가 말하자 L이 뭔가를 열심히 찾더니 거기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한 장이 또 미처 발견 못 한 팝콘처럼 구석에서 나온 셈이라 나는 얼른 말을 고쳤다.

 

“거기서 사진을 찍은 게 거의 없잖아?”

 

그 역시 그곳을 집으로 헤아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그곳은 집이 아니라 경유지일 뿐이었다. 너무 짧게 머물렀고, 정이 든 가구도 없고, 그곳을 떠날 시점을 명확히 알았다는 이유 말고도 중요한 건 거기 머무는 내내 우리가 다른 집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곳이 임시 거처라는 생각을 잊을 필요가 없어서 거기서는 늘 리모델링중인 다른 집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 집은 다른 집 안으로 흡수되고 만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예열 과정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그 겨울, 우리는 임시거처의 루버창이 열린 줄도 모르고 살았다. 이 집은 왜 이렇게 추워, 하면서도 뭔가를 살피지 못했는데 그곳을 떠나기 며칠 전에야 침대 옆 숨어 있던 창문이 열려 있음을 발견했다.

 

40일이 지난 후 우리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내려앉은 천장부터 불필요한 장식물, 문과 창틀까지 모두 철거하고 골조만 남겼던 집이다. 굵은 펜을 들고 가서 원하는 위치에 콘센트와 스위치, 벽등을 그린 기억이 난다. 퇴근 후 밤이 되면 그날 하루치의 공사가 끝난 집에 찾아가 낯선 어둠과 친해지려 했던 기억도 난다. 주말 아침 도배팀이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하던 기억도 난다.

 

무엇보다도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이웃의 동의서를 받던 날의 기억이 강렬하다. 우리는 직접 동의서를 받으러 다녔는데 동의를 구해야 할 여덟 집 중 한 집에서 공사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80대 부부는 소음을 견딜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공사 소음이 없을 거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이걸 어쩌나. 그때 이웃 할아버지가 내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니? 나는 바로 전에 살던 동네를 얘기했다. 그 이전에는 어디에서 살았냐고 묻기에 또 바로 전에 살던 동네를 얘기했다.

 

“장인어른이 구례 분이세요.”

 

L의 말에 할아버지는 자신이 목포 출신이라면서 내게 아버지가 구례냐고 물었다. 나는 묻는 말에 상세히 대답했다. “아,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서울로 올라오셨고요, 엄마는 문경이에요.”

 

L은 그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이웃 할아버지의 억양과 의중을 짐작해 어렵게 구례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가 아빠는 구례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이라고 말하더니 갑자기 ‘엄마는 문경’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이웃 할머니가 “아빠가 구례면 자식도 구례지”라고 말했을 때 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반반인 거죠. 엄마는 문경이니까.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요”라고 말했다는 것까지. 대체 그 대화가 무슨 대화인지 나는 그때까지도 감을 잡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알게 됐다. “구례라고 하니까 해주는 거여” 하면서 이웃 할아버지가 동의서에 사인을 하신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세상 눈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 집은 초등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멀리는 산이 보인다. 우리는 초등학교도 이미 졸업했고 학부모가 될 계획도 없지만 이 운동장 전망과 사랑에 빠졌다. 눈이 오는 날 새하얀 운동장 위에 한 사람이 우산 끝으로 편지를 쓰고 다른 한 사람이 그걸 집에서 내려다보는 상상도 했다. 유독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날, L이 약간 수선을 떨면서 나를 깨웠다. 밤새 운동장에 외계인이 다녀갔는지 이상한 게 있더라는 것이다. 나스카라인이 어쩌고, 어떻게 저런 게 있을 수가 있어 어쩌고, 진짜 이상해 좀 봐봐 어쩌고... 창밖을 보니 운동장에 거대한 사랑 고백이 있었다. 정말 거대했다.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이 적힌, 언제 내려갔지? 어제 산책할 때 다녀온 거구나! 아니 어떻게 말도 안 했어! 이제 수선을 떠는 건 내 몫이었다. 무엇보다 내 시선이 오래 머무른 건 고백 몇 글자를 쓰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을 한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이 점선처럼 이어진 그 눈밭은 날이 풀리면서 녹아버렸지만 나는 녹기 전에 봤다. 언젠가, 어느 겨울엔 답장도 쓸 것이다.

 

이 운동장엔 일요일 아침이 되면 L과 내가 오묘라고 부르는 다섯 마리 고양이가 등장해 뒹굴뒹굴 볕을 쬔다. 놀랍게도 모두 2미터 간격으로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까치와 까마귀도 이 운동장을 이용한다. 가끔 아이들이 등장해 한바탕 축구를 하고 지나가면 운동장에는 또 다른 편지가 등장해 있다. 모래밭 위에 누군가 쓴 ‘못생긴 OOO’는 햇빛에 녹을 일도 없어 꽤 오래 간다. 운동장은 확실히 내 ‘영감’ 밭이 되었다.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열두 번째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은 열두 권의 앨범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내 열두 번째 앨범이 어떤 풍경을 담아낼지 나는 아직 다 모른다. 다만 언젠가 이 앨범을 떠올리며 무궁한 호기심과 안부에 사로잡힐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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