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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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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선 노트

결혼하지 않는 도시

세상 모든 사랑은 실루엣이 없다 | 신경진 장편소설
신경진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07월 | 276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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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 지음/마음서재/2021년 07월/276쪽/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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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세계문학상 수상작가 신경진 신작 장편소설

도시인의 자발적인 사랑을 지지하는 현실 공감 로맨스

 

작품은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의 도시,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이어서 닮은 듯 다른 세 남녀를 등장시켜 시대적·사회적 분위기가 갖는 당시의 결혼상을 강렬히 대조시킨다. 자손 번식과 재산 증식에 매달리는 영임과 하욱, 불안한 청춘 속에 꿈도 사랑도 택할 수 없는 은희, 정우 그리고 태윤, 그들만의 방식으로 결합을 시도하는 한나와 태영이 그 주인공이다. 성장과 개발을 외치던 1960년대, 자유와 전통이 혼재된 1990년대, 개인과 행복이 최우선인 2000년대까지 결혼의 풍속도가 한눈에 펼쳐진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하나가 되는 순간을 꿈꾸는 법. 이 같은 바람으로 탄생한 결과물이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일 것이다. 우리는 소설 안에서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진화돼온 결혼의 이면과 맞닥뜨린다. 또한 깨닫는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이며, 홈쇼핑에서 물건을 골라 담는 일처럼 한낱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 저자 신경진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한국외대 헝가리어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레스브리지대학, 맥매스터대학에서 영문학과 컴퓨터사이언스를 공부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이렇다 할 내일의 윤곽은 없었다. 무채색 니힐리즘으로 보낸 사색의 시간이 펜을 잡는 계기로 이어졌다.

 

2007년, 첫 장편소설 ‘슬롯’으로 제3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신작 ‘결혼하지 않는 도시’는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하는 7년 만의 장편이라는 데서 특별함이 크다. 서로 다른 라임으로 전개되는 세 남녀의 사랑법, 그 너머의 공존을 다루려는 독특한 시선이 ‘결혼’과 대비돼 날카롭고 묵직한 시선을 발산한다.

 

현재는 소설가이자 강연자로 국내외 문학을 아우르며 픽션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 여전히 흔적과 기록의 삶을 믿는다. 우연의 교차점을 거닐며 결혼이 주는 불균형의 세계를 만끽한다. 지은 책으로는 ‘슬롯’, ‘테이블 위의 고양이’, ‘중화의 꽃’, ‘유희의 국경’ 등이 있다.

 

■ 차례

1장 타인의 침범

2장 신기루와 오아시스

3장 이곳이 평행세계라면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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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 지음/마음서재/2021년 07월/276쪽/14,000원

  

타인의 침범

신혼여행 둘째 날. 해운대 바다는 불타는 태양 아래 진녹색 파도를 밀어내며 지친 사람들을 유혹했다. 해변에서는 한 떼의 젊은이들이 바다로 뛰어들고 있었다. 하욱은 신부 뒷발치에서 어촌 풍경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말없이 앞만 보며 걷던 영임이 걸음을 멈췄다.

 

“이제 와서 어쩌자고 이런 이야길 털어놓는 거예요?”

 

“당신은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진실?”

 

질문을 되받은 하욱은 고통스러웠다.

 

“당신 형도 같은 생각이에요? 당신이 평생 빚진 거라고?”

 

하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형은 그런 남자가 아니다.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나 같은 얼굴을 지녔지만 형제는 실제 닮은 데라곤 찾을 수 없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아내도 양가 상견례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똑같은 외모의 형제 중 하필이면 동생을 소개받았을까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 눈앞에 뭐가 보여요?”

 

영임이 도로변 좌판에서 해산물을 파는 해녀 무리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여자들은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생선 위로 추락하는 파리를 쫓고 있었다. 하욱은 가난한 사람들이 싫었다. 당장이라도 신부의 손을 잡고 호텔로 돌아가 뙤약볕을 피하고 싶었다.

 

호텔 라운지에는 달맞이 언덕 골프장에서 스윙을 즐기는 특권층 신사들과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부인들이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하욱은 그들이 부러웠다. 현대 코티나와 피아트를 타고 내려온 피서객들은 올림포스 신전의 신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는 아폴론의 황금 마차 같은 차들을 바라보다 버스로 신혼여행을 온 자신과의 신분격차에 쓰라린 패배감을 맛보았다. 그 순간에는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유력 신문 기자가 된 이력도 빛이 바랬다.

 

“당신, 월남에서 받은 돈 아직 통장에 있다고 했죠?”

 

하욱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면 살림집에 보태기 위해 남겨둔 돈이었다.

 

“내 혼수와 합쳐 여기다 땅을 사요.”

 

영임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오직 어리석은 여자들만이 사랑이라는 몹쓸 전염병에 걸려 순결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향 청도에서 이름 높았던 언니의 아름다움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탈출을 꿈꾸었다.

 

남자들은 성욕과 사랑을 혼동했다. 그들은 여자를 소유했다는 기쁨을 느끼는 순간, 아름다움이 소멸되었음을 알고 권태로 몸을 떨었다. 권태는 분노로, 분노는 폭력으로, 여자에게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영임은 고향 집을 떠나 대구의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방직공장의 백열등 아래서 미싱을 돌렸다. 밤에는 교실 책상에 엎으려 쪽잠을 잤다. 그녀는 남자를 믿지 않았고, 낭만적 사랑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러나 졸업을 코앞에 두고 무적의 바이러스 백신을 맞은 듯 경계심을 잃었다.

 

회식 자리에서 만난 대학생이었다. 여름이 가기 전 총 세 번의 데이트를 한 후, 그녀는 포항의 어느 산사 아래 민박집에서 순결을 잃었다. 그녀는 대학생 오빠가 이 그늘진 민박집으로 동료 여공들을 데려왔다고 확신했다. 사랑이라는 질 나쁜 전염병에 걸린 자신이 미치도록 싫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서울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신하듯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청도 깡촌에 사는 소작농 딸도, 대구 방직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는 공순이도 아니었다.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미혼 여성이 버티기에는 고된 일을 도맡으며 쌈짓돈을 모았다. 신용이 쌓이자 포목점 상인들의 계 모임에서 계주를 맡았다. 달러이자를 받는 돈놀이는 체질에 맞는 돈벌이 수단이었다. 급전이 필요한 상인들은 누구나 경상도 똑순이를 찾았다.

 

그녀는 수년간 모은 돈을 투자해 여대 앞에 옷 가게와 화장품 가게를 열었다. 불과 20대에 자기 이름을 내건 점포 사장님이 된 것이다. 순진한 부잣집 여대생들은 처녀 사장에게 영혼을 빼앗긴 채 값비싼 화장품과 옷을 사들였다.

 

영임의 혈관에는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상인의 피가 흘렀다. 그러나 돈이 쌓이고 가게를 늘린다 해서 행복까지 함께 커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대생들이 졸업 후 더욱 유복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들은 추억에 잠겨 남편의 자가용을 타고 가게를 방문했다. 양키 가수에게 빠져 비명을 지르던 여자아이가 하룻밤 사이 중소기업체 며느리가 되거나 의사, 변호사 부인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육체노동으로 쳇바퀴를 도는 영임에게 일종의 마법과도 같았다. 그녀들이 호사스러운 웃음을 터뜨리고 떠난 자리에는 질투심이 타올랐다.

 

심사숙고 끝에 영임은 결정을 내렸다. 그해 겨울 대입 시험에 응시해 논밭으로 둘러싸인 한 여자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등록금만 내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다.

 

졸업을 앞둔 시즌에는 중매쟁이가 가져온 이력서를 받아 들고 남자를 골랐다. 결혼은 무모한 도박에 가까운 자유연애와는 달리 달콤했다. 그녀는 남자들의 직업과 사회적 배경을 저울질하며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 모험심이 강해서 공무원과 의사, 변호사 등 안정적인 직업에는 덜 끌렸다. 그녀에겐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줄 강한 남성적 매력의 소유자가 필요했다.

 

영임은 라이방 선글라스에 군용 지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육군 소장의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하욱의 이력을 꼼꼼히 뜯어보며 월남 정글을 헤맨 초급장교의 활약상을 머릿속에 그렸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 살아남아 훈장을 받은 남자였다. 이런 남자라면 어떤 위험에도 굴복하지 않으리라. 그는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이자 신문사의 기자였다. 문무를 동시에 갖춘 남자에게 그녀는 비로소 인생을 걸어볼 유혹을 느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영임은 남편 하욱과의 인연을 떠올릴 때마다 해운대 모래사장 위를 떠돌던 열기를 기억했다. 그 순간이 그녀의 인생을 결정지었다. 그녀는 남자의 야심과 무분별한 욕망에 분노했다. 대리시험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직장마저 형의 도움으로 구한 남자의 위장술은 그동안 자신이 신분을 세탁한 과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야비한 속임수였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영임은 상견례 자리에서 남편의 형을 보고 그로테스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신랑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한쪽 구석에 외따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신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실패한 고시생이 시아주버님이 된다니 섬뜩했다.

 

상견례를 끝낸 날, 영임은 시집과는 반드시 인연을 끊겠다고 다짐했다. 표독스러운 시어머니와 무능한 시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얽힌 뿌리 깊은 혈연관계. 그녀는 살 속을 파고든 기생충의 역겨운 비린내를 감지했다. 그것은 결혼이 몰고 온 최초의 먹구름이었다.

 

1970년의 정부는 천만 평에 이르는 영동지구 땅에 대한 개발사업을 발표했다.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에서 영동이라고 불린 이 땅은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로 쪼개져 수십 년은 이어질 부동산 불패 신화를 쓰게 된다.

 

그녀는 해운대 바다에서 본 고층 빌딩의 환영보다 더 거대한 군단이 진군해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시골집과 전답을 팔고 친정 식구들을 모두 서울로 불러들였다. 굶어 죽을지라도 땅을 사수하라는 서울 막내딸의 명령이 내려졌다.

 

친정 식구들은 각각 신사동과 양재, 잠실 일대에 흩어져 말뚝을 박았다. 그녀 자신은 반포와 강남 터미널 일대에 밭을 샀다. 처녀 시절, 달러이자 놀이를 하며 돈을 불린 경험이 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그녀를 승자로 만들었다.

 

그녀는 남자의 생리적인 욕망을 혐오했다. 그럼에도 영임은 아이를 원했다. 그녀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신화의 노예였다.

 

그러나 신은 불공평했다. 시간이 흘러도, 노력을 해도,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산부인과 의사가 자신의 육체에 의학적 불임이라는 딱지를 붙였을 때도 돌팔이라며 증오할 뿐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셋째 아이의 입학이 다가오자 시아주버니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고시 공부를 접었다. 충격받은 아내가 속절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만류해도 그는 쌍둥이 동생을 찾아가 취업 알선을 부탁했다. 결국 상욱은 한 중소기업에 과장 직함으로 일을 잡았다. 이 이야기는 동생이 승승장구하면 형도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이동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생은 그렇게 평생 형의 신세를 갚았다.

시집에서 돌아온 영임은 새카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이를 낳으면 그런 예쁜 딸을 낳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속에서 로코코 시대의 공주처럼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아기의 모습을 보았다.

 

“그 계집애를 데려와야겠어. 걔는 내 딸이야.”

 

며칠 후, 신랑 정하욱과 신부 강영임은 큰집 막내딸 정선미를 양녀로 입양했다.

 

“태윤이라는 이름 어때? 근사하지 않아?”

 

영임은 아이를 사랑했다. 아기를 안으면 맥박과 체온으로 전달되는 파동에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아이가 공주처럼 자라기를 원했다. 백화점에서 옷과 장난감을 사고, 흔치 않은 최고급 아기용품을 구입했다. 유아침대와 유모차는 밀수입한 제품이었다. 탱크처럼 튼튼한 유모차에 태윤을 싣고 나서면 아기를 둘러업고 나온 이웃 여자들의 시샘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그녀는 태윤이 학교에서 돌아오길 기다렸다. 열 살이 된 딸은 꽃봉오리가 터지듯 여자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임은 태윤을 조수석에 태워 학원까지 데려다주는 시간을 사랑했다. 태윤은 어린 새처럼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보고했고, 운전대를 잡은 영임은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딸이 시무룩해져 돌아오면 자신마저 우울증에 걸린 환자처럼 괴로워했다.

 

며칠간 소화 기능이 떨어져 병원을 찾았다. 일주일간 처방 약을 먹어도 어지럼과 소화불량이 가시지 않았다. 건강한 체질을 물려받아 잔병치레가 없는 그녀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작은 일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내과 전문의는 산부인과에 가보라고 조언했다. 영임은 자신의 쓸모없는 자궁에 악성종양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며 진찰 의자에 앉았다. 처음에는 의사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칼날이라도 박힌 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내가 정말 아이를 가졌다고요, 선생님!”

 

욕망이란 뱀과 같은 것일까. 아들에게 젖을 물린 이후로 영임은 얼쩡대는 태윤의 꼴이 보기 싫었다.

 

‘왜 저 아이가 내 딸이 되었을까?’

 

영임은 자신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저주했다. 태윤은 그녀가 싫어하는 식구의 일원이었다. 중학생이 된 얼굴에는 시어머니의 표독한 눈빛마저 어른거렸다.

 

“독한 년!”

 

젖을 물리다 잠든 영임이 비몽사몽간에 내뱉은 말이었다. 당시에는 산후우울증이라는 병명조차 없던 시대였다.

 

“시골집에서 조카딸을 데려올까? 데려와서 밥도 시키고 빨래도 시키면서 휴식을 취하는 거야. 식모아이 데려올 형편은 되잖아?”

 

“미쳤어. 돈을 허투루 쓰게. 태윤이 쟤도 이제 살림할 나이는 됐잖아. 지금까지 배부르게 먹여줬으니 저도 제 몫은 하겠지.”

 

...

 

정우는 청량리역에서 춘천 102보충대, 그리고 원통의 사단신병교육대로 이동해 군인이 되었다.

 

면회 요청을 받았을 땐 단순한 행정 착오라고만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설산의 등불처럼 켜졌다. 태윤은 떠났고 자신은 버려졌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강원도 오지 산골 부대까지 찾아와 면회를 요청했을까?

 

“오빠!”

 

몸을 돌린 정우가 신음을 터뜨렸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 진짜 놀랐나 보네.”

 

은희였다. 은희는 입대 전 기억 속 모습 그대로 화려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늘 진한 화장을 하고 있던 그녀가 수수한 옷차림에 거의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허리 라인이 잡힌 캐주얼 재킷을 입은 그녀에게서 대학 3학년생다운 여유가 넘쳐났다.

 

“오빠, 우리가 동지라는 건 알지?”

 

기어를 중립에 놓은 채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은희가 말했다. 갈색 선글라스 뒤로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오빠는 태윤이에게 차였고, 나는 용재에게 차였잖아. 그러니까 동지지. 그 둘이 사귄다는 소식은 들었어?”

 

그 한마디로 정우는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은희는 정우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가 예쁘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는데 지나치게 느린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빠는 이제 태윤이 잊었어?”

 

자신을 응시하며 케이크를 자르는 여자아이의 눈빛이 빛났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기분 나쁘지 않죠? 뭐 형도 손해 본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태윤이와 재미는 봤잖아요.’

 

용재가 말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받은 일격이라 그는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 부잣집 아들의 말에 설득당했는지도 몰랐다.

 

그날 밤 녀석은 욕실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아이를 껴안고 키스 중이었다. 바로 은희였다.

 

“다 끝났어. 난 다가올 유격훈련 걱정만으로도 벅찬 군바리야.”

 

농담처럼 들리도록 신경 썼지만 목소리는 딱딱했다.

 

“거짓말이라도 기분은 좋네.”

 

은희가 미소지었다.

 

“그럼, 우리 잘될 가능성은 있는 거지?”

 

다음 날, 민통선 면회소에서 정우가 손을 맞잡고 작별하며 말했다.

 

“언제 다시 올거야?”

 

“곧. 오빠가 그리워할 때마다 나타날 거야. 난 이제 오빠 거잖아.”

 

부대로 복귀하는 트럭에 올라 출입 금지 구역에서 자란 관능적인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혼돈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혼란은 너무도 달콤해서 절대 뿌리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사랑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한 해가 흘러 추석을 앞둔 1993년 가을, 육군 병장 홍정우는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여자친구는 열 번 가까이 면회를 왔고, 수십여 통의 연애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는 그녀의 낙천적인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졸업을 앞둔 은희는 취업 준비를 위해 가락동 인근 신축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정우는 밀양 시골집에서 채 며칠도 안 돼 서울로 올라왔다.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자 가파른 강원도 고갯길을 오르내리던 에스페로는 그의 차지가 되었다. 항공사 승무원을 지망생인 여자친구를 학원까지 태워다 주는 일도 주요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모델 워킹과 배꼽 인사법을 배우는 동안 정우는 근처 도서관에서 경제학 전공 서적을 읽었다.

 

미래가 불완전하기만 한 20대 후반, 그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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