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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채우는 그림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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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채우는 그림 인문학

삶이 막막할 때 그림을 보다
유혜선 지음 | 피톤치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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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그림과 인문학으로 한걸음씩 자기 성장을 하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지만 인문학은 어쩐지 우리 삶과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아름다운 명화와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문제와 아픔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림과 예술가의 삶에 담긴 인생의 비밀과 삶을 바라보는 혜안을 찾는다.

 

많은 사람이 미술과 인문학을 접근하기 어려운 취미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 삶과 어울리지 않는 고리타분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미술의 진정한 매력에 빠져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불완전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선과 색채로 불행까지도 승화시켰다.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 잘 이해하는 길이다.

 

삶의 무게가 부쩍 무겁게 느껴지고 행복이 멀리 있는 것 같은가?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전부 다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림에는 우리의 상처 입은 영혼을 어루만지고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힘이 있다. 삶의 질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웠던 예술가의 삶이 독자들을 위로할 것이다. 사랑과 죽음, 행복 때문에 흔들리고 때론 자아를 잃고 휘청거리는 이들을 위한 힐링 여행으로의 초대! 그림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위로이자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다독이는 손길이다.

 

■ 저자 유혜선

삶의 진정성, 품격, 사랑과 같이 행복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호기심이 발동한다. 십대 시절엔 한국 무용을 하였고 대학에서 헤겔의 사상과 전혜린의 맑은 이성에 빠져 들었다.

 

웅진그룹에서 20년간 기업교육을 하고, 그 이후 10년 이상 대학에서 강의했다. 인문학을 강의하면서 교육의 목표는 니체의 초인 정신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인적 자원개발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고품격 서비스마케팅으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책을 쓰고 강의를 하면서 영혼의 자유를 누리며 그 자유를 실천하며 표명하는 것을 천직이라고 믿는다. CEO, 예술인, 지식인이 함께하는 만남의 장, ‘와인 인문학 살롱’을 10년 이상 진행해 왔고, 일상에 예술을 더하는 인문학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당당한 서비스』『블루스타킹』『물결리더십 The Wave』『그녀의 명품스피치』『스토리 마케팅』『그림, 만나다』등이 있다.

 

■ 차례

추천사

서문

 

PART 1 자아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나는 어떤 얼굴인가? | 제임스 엔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어딜! 뭘 봐? |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독서는 나의 힘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여자〉

나만의 색으로 무늬를 만들다 |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초인을 소망하는 나쁜 남자의 향기 | 에드바르트 뭉크, 〈프리드리히 니체〉

모멸감을 이기는 자존감 | 파울 클레, 〈두려움의 엄습Ⅲ〉

나의 가치는 내가 결정한다 |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럭셔리, 그 유혹과 사치의 비밀 | 헨리 베이컨, 〈출발〉

닫힌 대중에서 열린 개인으로 | 에드바르트 뭉크, 〈사춘기〉

 

PART 2 사랑 | 새의 날개를 꺽어 그대 곁에 두지 말라

정신적으로 방탕하고 싶다 | 자크 루이 다비드, 〈남성 나체〉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 앤서니 프레드릭 샌디스, 〈메데이아〉

벽을 넘지 못한 사랑 | 까미유 클로델, 〈중년〉

따로, 또 같이 | 구스타브 카유보트, 〈오르막길〉

슬픈 사랑의 변주곡 | 디에고 벨라스케스,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

가족, 울인가? 덫인가? |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악 롤리타 | 폴 고갱, 〈영혼이 지켜본다〉

마음속 칼날을 내려놓기 | 페르낭 크노프, 〈내 마음의 문을 잠그다〉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부채를 든 여인〉

세상의 남자와 여자 | 에드워드 콜리 번 존스, 〈심연〉

 

PART 3 인생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창 밖의 남자들 | 일리아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리 스텝이 꼬여도 | 오귀스트 르누아르, 〈시골 무도회〉

내일을 기대하지 않아요 |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청춘의 블루 |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노동이 신성하기만 할까? | 구스타프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삶이 왜 이다지도 고단한가? | 줄 바스티엥 르파주, 〈건초 만드는 사람들〉

술의 신, 바카스의 유혹 | 프란스 할스, 〈유쾌한 술꾼〉

 

PART 4 죽음 |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

반쯤 밀어내고 반쯤 끌어안은 엄마 | 르누와르, 〈어머니의 초상〉

아버지, 나의 아버지 | 폴 세잔 〈화가의 아버지〉

이루지 못한 욕망과 꿈 | 헨리 퓨젤리, 〈악몽〉

욕망이 영혼을 잠식하다 | 에드바르트 뭉크, 〈뱀파이어〉

죽음을 생각하라 | 한스 홀바인, 〈대사들〉

삶은 수직이고, 죽음은 수평이다 | 피트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PART 5 행복 |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

꿈꾸는 에로티시즘 | 구스타프 클림트, 〈다나에〉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호기심으로 | 바실리 칸딘스키, 〈스카이 블루〉

가위는 연필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다 | 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인생을 즐겨라 | 페테르 파울 루벤스, 〈바쿠스의 축제〉

와인 한 잔 하실까요? | 디에고 발라스케스, 〈술꾼들, 바쿠스의 축제〉

살롱문화, 취미와 공유를 넘어 |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그녀들의 우아한 연회 |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 섬의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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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선 지음/피톤치드/2020년 1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나는 어떤 얼굴인가?

무척 상냥하고 예의 바른 후배 A가 있다. 고운 미소에 목소리 톤이 밝고 경쾌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누구나 그 후배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녀는 무척 매력적이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무엇이든 될 것 같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잘 헤쳐 나갈 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좋은 인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

 

그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근사한 미사어구로 포장된 화술과 자신의 가면적인 유희를 즐기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그녀는 늘 행복하고 유복한 집안의 여인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과 다르게 그녀는 이혼을 했고 두 딸과 함께 그리 넉넉하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과 다르게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남자관계도 복잡했다. 그녀의 일관성 없는 말과 행동에 사람들은 지쳤다. 더 이상 그녀를 신뢰하지 않았다. 화려한 미소에 감춰진 진실이 드러났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배신감은 컸다.

 

해골과 가면의 화가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의 그림은 볼 때마다 슬퍼진다.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에서 독특한 비애를 엿볼 수 있다.

 

벨기에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엔소르는 슬프고 기괴한 가면을 쓴 사람들을 통해서 타락한 인간의 모습과 그들이 느끼는 공포를 철학적으로 표현했다. 그림 속의 빨간 깃털 모자를 쓴 남자는 온갖 표정의 가면에 포위되어 있다.

 

그는 마치 예술의 순교자처럼 보인다. 가면 속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맨얼굴을 드러낸 모습이 어쩐지 불안하다. 굳건한 의지가 보이는 눈동자가 왠지 더 불안하고 초조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가면을 쓰고 웃거나 울면 좋으련만.

 

어린 시절 제임스 엔소르의 어머니는 가면을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익명성에 기대어 온갖 추악한 일을 자행하는 인간의 굴절된 욕망을 보았다. 불안과 공포가 빚어낸 인간의 이중성을 일찍 알아차린 것이다. 엔소르는 가면이 또 다른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심리학적인 관점에 의하면 융은 외부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페르소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르소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 질서, 의무 등을 따르거나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다스리기 위한 가면이다. 즉 실제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면이 페르소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실제 타협의 범위가 그다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아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까지가 가면인가 하는 물음이 따라다닌다.

 

페르소나와 이미지 메이킹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근사한 미사어구로 포장된 화술과 자신의 페르소나를 과시하고 가면적인 유희를 즐기며 산다. 이 세상은 카니발처럼 현란하고 기괴한 가면이 넘친다. 현대에서는 이것을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자신이 세상에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살 수 없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변하는 마음을 그대로 다 표현한다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다면적 인격의 구성체이기도 하다. 가면은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결핍은 적절하게 가려주는 안정된 방패막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면을 쓰고 가면을 써야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이런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가면을 쓴 모습이 정상이라고 믿게 된다. 가면을 벗고 맨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가면을 쓸 줄 아는 것도 현대인의 능력이다. 문제는 균형이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균형을 중시하여 ‘중용’이라고 했고 오늘날에는 ‘균형감’이라고 한다.

 

모멸감을 이기는 자존감

한 여성이 복도를 지나다가 서류를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청소노동자 H가 다급하게 “아줌마!”하고 불렀다. 그러자 그 여성은 “내가 이 학교의 교수인지 모르냐?”하고 H를 꾸짖었다. H는 화장실 청소 도구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분한 마음에 한참을 울었다.

 

“아줌마라는 말이 어때서!”

 

아무리 생각해도 분을 삭일 수 없다. H가 청소 일을 한지는 10년 정도 됐다. 결혼 전에 잠깐 대학에서 행정 업무를 본 인연으로 다시 학교에서 일하게 됐다. 이른 시간부터 일을 하니 일찍 퇴근해서 가정을 돌볼 수 있어서 이 일에 만족했다. 그러나 가족과 가까운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대학에서 청소하는 것을 모른다. H는 그날 그 교수에게 받은 모멸감에 며칠을 끙끙 앓았다.

 

교수가 공공장소에서 H를 꾸짖은 것은 잘못이다. H도 호칭에 있어서 배려가 부족했다. 사실 ‘아줌마’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더 강하다. 나이든 여성이라면 누구나 아줌마란 호칭이 반갑지 않다. 더구나 교수한테 아줌마라고 했으니 그 교수도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청소노동자를 꾸짖은 행위는 옳지 않다. 교수는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을까? 단순히 기분이 나빠서, 아니면 상대방이 청소 노동자였기 때문에?

 

분노가 된 모멸감

파울 클레(Paul Klee)의 그림 <두려움의 엄습Ⅲ>을 보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파울 클레는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고수한 화가다. 이 그림을 통해서 그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사는지 그리고 감정을 억누르고 사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표현해냈다.

 

<두려움의 엄습Ⅲ>과 비교하면 세기말의 절망과 공포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는 그나마 인간적이다. 파울 클레의 <두려움의 엄습Ⅲ>에는 절망이 묻어난다. 여기서 말하는 절망은 절대적 소외와 고독이다. 절대적 소외와 고독은 외부에서 충격을 받으면 이내 폭발하고 만다. 묻지마 폭행, 묻지마 살인처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야기되는 사건들이 우리 사회를 더욱 더 슬프고 불안하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H를 꾸짖은 교수의 내면에 절망이 가득했던 것 같다. 번듯한 겉모습과 달리 자존감은 낮았던 게 아닐까. 교수라는 자부심은 강하지만 자존감은 부족해서 훨씬 약자인 청소노동자를 공격한 것이리라.

 

자부심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감정이다. 자부심은 자신보다 못한 강대가 있을 때 작동한다.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도 위험하다.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찾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굴종하는 이를 보면서 더욱 모질게 대하고 묘한 희열감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잔인하다.

 

서로에게 잔인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부심과 자존심에 앞서 자존감을 키워야 한다. 자존감은 일시적이거나 상대적이지 않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항상 자신을 믿고 사랑한다. 다소 불편하고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도 자존감이 있었다면 서로 배려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류를 잃어버렸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고맙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교수님인 줄 모르고……. 제가 실수했어요.”

 

닫힌 대중에서 열린 개인으로

강의를 오래 해왔지만 아직도 강단 앞에 서면 긴장된다. 열 명 미만의 소그룹 강의가 더 많이 떨린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춰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마치 열린 개인들 앞에서 나체로 서있는 것 같다. 차라리 다수의 대중이 더 편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에게 대중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여 감정적인 부담이 덜한 것 같다. 반면에 개인은 그의 감정이 하나하나의 개체로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어렵다. 그래서 대규모 인원을 상대로 한 강의가 더 편안하다.

 

그러나 이제라도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각각의 개인으로 세상과 나를 돌아보려 한다. 그동안 나와의 만남을 미뤄온 탓인지 나를 돌아보기도 전에 두려움이 앞선다. 왜 그럴까?

 

19세기 말 절망과 공포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자신이 마치 사춘기를 맞은 아이처럼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가 그린 <사춘기>의 발가벗은 소녀는 앙상한 두 팔, 아직 덜 자란 젖가슴, 겁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한다. 소녀의 눈에는 왠지 모를 두려움이 가득 차 있다.

 

외로움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아이는 현대인의 황량하고 불안한 내면과 닮았다. 오늘날 문명의 풍요롭고 거대한 울타리를 걷어내면 작고 초라한 개인이 나타난다. 대중 속에 익명으로 있을 때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다.

 

보이지 않는 감옥

우리는 왜 불안에 떠는가? 스스로 미래를 예측하고 삶을 주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이러한 현상을 ‘시스템에 의한 생활 세계의 식민지화’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언어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의 지배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될 수 없다.”는 경영 이론으로 모든 사회적 가치가 획일화되고 표준화됐다. 우리는 그러한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이는 미셸 푸코(Michel Paul Foucault)가 말한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서 사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의 화려한 물질과 권력은 매우 교묘하고 정교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우리의 고유성과 개성을 말살했다. 마치 덜 성숙한 뭉크의 사춘기의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세상은 보이고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남들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가치가 됐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 자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명치에서 꿈틀거리는 본능, 이 주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감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기존 가치와 기준에 저항하며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앞으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들은 자신만의 삶의 패턴과 색으로 살고자 한다. 어떠한 이성적인 권위에 억압되지 않은 개인으로 살자고 부르짖는다. 문제는 획일화된 가치를 제외한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점이다. 이미 잃어버린 우리의 고유성과 개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 딜레마를 해결해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삶이 딜레마에 빠졌을 때 역사와 고전, 자연과 예술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인문학이 다시 떠오른 이유도 그래서다. 잃어버린 고유성과 개성을 찾기 위해서, 딜레마에 빠진 우리의 삶을 구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공부한다. 인문학사에 길이 남은 철학자, 작가, 예술가, 사상가 등 개인의 본성에 충실하며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던 이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그들이야 말로 진정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호기심으로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행사에 10인의 멘토로 선정됐을 때의 일이다. 만찬 전에 주변에 앉은 여성들과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은 이는 탈북인 출신의 여성 박사라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동남아를 거쳐 남한에 온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첫 느낌이 어땠어요?”

 

그녀가 처음 본 서울은 화려한 색이 어우러져서 무척 밝고 환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의 옷차림이나 표정, 길거리의 간판과 쇼윈도의 색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심리적 차원의 색이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푸른색이 주는 편안함과 안도감. 그녀가 서울에서 본 색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스카이 블루>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마치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은 자유의 색, 블루는 자유의 색이다. 그리고 축복과 환희의 색이다.

 

나만의 색, 써니 블루

블루는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색이다. 나는 블루의 이중성이 좋다. 블루는 멜랑콜리하고 거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암울함을 대변한다. 또 상당히 창의적이며 도덕적인 고품격의 매력도 있다. 그래서 블루는 첨단적이고 전문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체스 선수를 이긴 최초의 컴퓨터 이름이 딥 블루(Deep Blue)이고 삼성전자를 상징하는 색도 블루다.

 

나는 사람들에게 ‘색깔 있는 그녀, 써니 블루(Sunny Blue)'라고 나를 소개한다. 써니 블루는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이성을 아우르는 나만의 색이다. 아마도 이런 색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아폴론의 이성과 디오니소스의 감성을 겸비한 예술지상주의자를 추구하는 색이다. 니체의 예술지상주의는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는 예술지상주의적인 삶이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우리 삶은 이성적인 틀에 갇혀 있었다. 정답이 눈에 보일 때 인간의 행동은 쉽고 간단해진다. 사람들은 확실함, 단순함을 좋아한다. 복잡하면 불안해한다. 현대인은 조금의 불안함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한다. 다수가 하는 대로 하면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는 산업 성장시대를 살아가는 집단적이고도 폐쇄적인 대중의 사고방식이다. 물론 그들도 자유의 세계를 동경했을 것이다. 하지만 열린 사회에서의 개인은 불안하다. 이 사회는 지독하게 경쟁하며 상대를 자극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한다. 이기든 지든 결국 모두가 피를 흘리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열린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니체는 말한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호기심과 맑은 동심으로, 도덕이라는 의미 그 자체가 불필요하게 살라고. 사람은 누구나 어디에 살든지 간에 칸딘스키의 <스카이 블루>처럼 춤을 추면서 날아다니는 자유를 꿈꾼다. 자유를 향한 짙은 그리움. 그래서 블루는 희망의 색이고 그리움의 색이다.

 

인생을 즐겨라

괴짜 철학자인 K는 영혼이 자유로는 사람이다.

 

“신은 죽었다. 경영학도 죽었다. 오로지 예술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며 예술지상주의자, 아티스트임을 자처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생활도 그렇게 반반해 보이지 않아 늘 걱정이다.

 

심지어 K의 예술도 그렇게 감흥을 주는 것 같지 않다. 그가 말하는 예술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주변에서 물어본다. 그에게 있어 예술적 삶이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것이다. 이때까지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 일탈하는 재미를 느끼면서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것이 그의 예술적 삶이다.

 

인간적인 더욱 인간적인

괴짜 철학자 K는 오늘도 고민한다.

 

‘4차 산업혁명이 우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경제적으로 편리하고 풍요롭지만 과연 우리는 도덕적으로 건강한가?’

 

인간이 기계를 만들고 기계에 지배를 받는 시대다. 기계는 인간의 삶과 행복, 존재마저 흔든다. 허무주의가 일상이 된 오늘날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19세기에 니체는 신과 종교에 의한 권위에 도전하여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믿음의 가치였던 패러다임이 무너지는 허무주의를 시대정신으로 부르짖었다. 우리의 괴짜 철학자 K는 “경영학은 죽었다(Management is Dead)!"는 말을 빌어서 과학의 시대를 종언하며 인간주의 정신을 외친다.

 

4차 산업혁명은 첨단의 AI와 인공지능으로 그동안 이어온 인간의 삶의 방식과 원칙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있다. 기계를 다루며 사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게 지배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로봇과 디지털 센스들이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인 능력을 능가하면서 인간의 존재 범위를 침범한다. 이런 인간 존재의 무용과 무능으로 인한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삶이 계속되는 한 변화와 발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거부할 수도 없고 물러설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괴짜 철학자 K의 말을 정리해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오늘날에는 ‘인간적인 더욱 더 인간적인’ 것으로 삶의 가치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경영의 시대‘는 가고 MFA(Mast of Fine Art) '예술의 시대’가 오고 있다. 집단적으로 사고하고 체계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시대가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사고하고 예술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예술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본능과 감정에 충실하며 사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나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영향력을 이해하고 나누고 어우러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니체 인문학의 핵심인 아폴론의 이성과 디오니소스의 감성의 조화와 균형이 이뤄진 예술지상주의가 답이라는 K. 그렇다면 그가 가장 예술적인 삶을 사는 행복한 예술지상주의자가 아닐까? 왠지 그가 이 시대의 진정한 자유인처럼 느껴진다.

 

살롱 문화, 취미와 공유를 넘어

현대인은 외롭다. 스마트폰을 비롯해서 각종 디지털 기기를 끼고 살고 SNS로 쉴 새 없이 소통하는 데도 왠지 공허하다. 기계적인 대화로는 타인과 깊이 소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영혼의 대화를 원한다. 눈빛을 교환하고 가슴을 달래주는 대화를.

 

그래서일까? 최근 서로의 감성을 공유하는 모임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빌딩 숲 뒷골목부터 젖어드는 어스름한 그림자를 밟으며 자신만의 밀실을 찾아 문을 두드린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광장에서 받았던 외로움과 상처를 밀실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문화와 지성의 탄생

살롱 문화는 17~18세기 유럽 귀족 문화의 산실이었다. 살롱에는 그림과 음악, 문학이 있었고 토론과 학습이 진행됐다. 무엇보다 그곳은 사교의 공간이었다.

 

살롱 문화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한마디로 살롱에는 자유정신과 ‘카르페 디엠’이 있다. 하루의 삶 속에서 속박과 답답함을 느낄 때, 무엇을 갈망하고 갈증을 느낄 때, 그들은 자유정신이 살아 숨 쉬는 살롱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자유정신 속에는 파괴성과 창조성이 공존한다.

 

파괴성은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불행에 대한 인식이다. 창조성은 이제껏 자신이 한 역할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롱에서 자유정신의 깊은 영혼의 소리를 통해서 성공에 대한 열망과 그것으로부터 매몰되지 않고 자신을 분리해 내는 능력을 배운다.

 

깊어가는 밤, 살롱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꽃핀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이 녹아 있다. 서로를 환대하며 편안하게 감정을 나눈다.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살롱은 그 자체로 따듯한 매개체다.

 

학습이 오락인 시대

한국 사회는 SNS를 위시한 온라인에서의 무책임하고 영혼 없는 소통으로 병들고 있다. 진정한 소통의 가치를 일깨우는 고품격 감성 커뮤니케이션이 절실하다. 인문학 살롱에서는 음악, 시, 미술, 문학, 철학, 금융, 와인 등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들이 오고 간다. 현대 살롱은 지적 경쟁력의 경연장이자, 소중한 만남과 유익한 정보가 함께 어우러지는 즐겁고 재미있는 학습의 장이다. 동시에 작지만 큰 목소리로 시대의 트랜드를 리드하는 지적 커뮤니티다. 와인과 함께 느림의 미학을 배우고 익히며 품격, 서비스 마케팅,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정신을 실천하는 모임이기도 하다.

 

평생학습의 시대, 언제까지 제도권 교육에 의존할 것인가? 이제는 국가와 기업의 인적 자원, 생산의 수단을 기르는 과정으로써의 교육에서 벗어나 차원이 다른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교육과 커뮤니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문화의 요람으로, 지식인의 품격 있는 놀이터로서의 살롱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