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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 인생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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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재정부

서애 류성룡 인생십계명

평화를 누리려면 전쟁을 준비하라
권대봉 , 신광철 지음 |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 2021년 09월 | 351쪽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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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봉 외 지음/느티나무가 있는 풍경/2021년 09월/351쪽/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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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평화를 누리려면 전쟁을 준비하라

 

류성룡은 조선의 대표적인 재상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문관으로서 전쟁의 지휘관을 맡아 조선의 위기를 극복해낸 인물이다. 변덕스럽고 겁 많은 선조라는 국왕이 조선의 왕으로 자리하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면서 전시내각을 이끌어 국난을 극복한 해결사였다. 인생을 산 당사자로서 저술한 책이 징비록이다. 징비는 ‘과거를 징계하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의미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전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 하나하나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가르침을 갖게 한다.

 

류성룡은 지혜와 현명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중도를 지키는 현장주의자였다. 좌우에 흔들리지 않고, 상하를 균형있게 관리하는 능력자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순신 장군과 권율을 천거해서 전쟁을 대비했고, 전쟁 중에는 전쟁을 이끈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다. 조선의 최대위기였던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서애 류성룡이 살아간 지혜가 담겼다. 위기를 살아가면서 지혜롭게 해결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처세를 배울 수 있는 책이다.

 

■ 저자 권대봉

고려대학교에서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쌍용그룹에서 8년간 근무한 후,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교육행정학과 조교수 및 국제전문인과정 디렉터로 일하였고,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출강하면서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에 인재개발과 관련한 자문을 하였다. 국민대학교에 봉직 후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및 사회교육원장, 교육대학원장, 사범대학장, 교육문제연구소장, 한국인력개발학 회장, 한국평생교육학회장, 중앙공무원교욱원 겸임교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방문 학자, 전경련 국제경영원 이사, 경동나비엔 사외이사로도 활동하였다. 현재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제5대 원장으로서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한국 위원회 집행위원, 교육과학기술부 자격정책심의위원, 노동부 고용정책심의위원이다. 저서로는 ‘글로벌 인재의 조건’, ‘직업준비 교육과 직장 계속교육’, ‘중 고령자의 고용과 평생학습’등이 있다.

 

■ 차례

책을 내며

 

제 1 부 서애 류성룡 10계명

01. 외부의 적과는 싸워도 내부의 적과는 싸우지 마라

02. 전쟁을 대비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지 마라

03. 결단의 순간에 망설이지 마라

04. 옳은 일을 했다고 당장 인정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05. 현장을 모르고 탁상공론으로 정책을 만들지 마라

06. 고정관념을 깨지 않고 세상에 인재가 없다고 하지 마라

07. 능력을 보지 않고 신분과 학력을 이야기하지 마라

08. 경계를 넘어 공부하지 않고 할 수 없다고 하지 마라

09. 마음을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10. 반성하는 삶을 살지 않고 내 인생만 힘들다고 하지 마라

 

제 2 부 서애 류성룡 일대기

01. 역사가 류성룡을 평가하다

02. 어린 시절 류성룡이 한양에서 자라다

03. 부모형제 가족관계

04. 17세에 혼례를 올리다

4-1. 이황의 제자로 학문을 익히다

05. 출세의 길에 나서다

5-1. 중앙에서 변덕스러운 선조와 함께하다

5-2. 출세가도를 달리다

5-3. 조선의 중요 관직을 두루 섭렵하다

06. 조선을 구할 육군의 명장 권율과 수군 수장 이순신을 추천하다

07. 전쟁 직전까지 소모적인 당쟁으로 해가 뜨고 해가 저물었다

08. 결국 전쟁이 일어나다

09. 조선의 반격 토대가 만들어지다

10. 반격의 토대를 마련하다

11. 류성룡은 전쟁의 책임으로 파직당하고, 이순신은 전장에서 전사하다

12. 낙향하여 하회에서 머물다

13. 징비록을 쓰다

 

서애 류성룡 선생 년보

 

책을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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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봉 외 지음/느티나무가 있는 풍경/2021년 09월/351쪽/16,000원

  

서애 류성룡 십계명

외부의 적과는 싸워도 내부의 적과는 싸우지 마라

내부의 적은 용서하라

조선의 붕당 정치가 시작되고, 붕당 간의 견제를 정권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해 철저하게 이용했던 인물이 바로 선조다. 조선 붕당 정치의 시작이 선조 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붕당을 즐기고 이용한 왕이 선조였다. 선조는 그 두 세력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훈구파는 조선이 개국하고 나서 세월이 흘러 사라지고 사림파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출발은 자리 하나를 가지고 싸웠다. 이조 정랑직을 놓고 대립했다. 붕당의 대표격인 김효원의 집이 동쪽 건천동에 살아 동인이라고 했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 정릉에 살아 서인이라 했다. 동인은 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을 이어받은 경상도 출신이 많았고, 서인에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와 경기도 출신이 많았다. 조선의 철학을 양분한 사람이 바로 이황과 이이였다.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두 인물이 있었을 때 붕당 간의 다툼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황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였고, 이이는 현실 정치를 우선으로 보았다. 류성룡은 동인이었다.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 사람으로 류성룡은 동인 중에서도 온건파였다. 붕당의 이익보다는 국사를 우선했다. 류성룡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객관을 유지하려 했다. 정치가 한쪽으로 기울면 바른길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뜻밖의 길로 간다.

 

정여립 모반사건을 살펴보자. 정여립은 본시 율곡 이이의 제자로 서인이었다. 정여립의 이력은 특별했다. 의리와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에서 보기 힘든 붕당을 갈아탄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여당에서 야당으로 당적을 옮긴 사람이었다. 조선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붕당을 갈아 타고나서 스승인 이이를 욕하고 다닌 사람이었다. 정여립은 선조의 미움을 사서 고향 진안으로 내려갔다.

 

정여립은 언변이 뛰어나고 사람을 좋아했다. 문제의 발단은 대동계를 만들어서 활쏘기와 말 타기, 그리고 무술을 연마하는 집단을 만든 것에 있었다. 조선 시대로서는 의심을 받을 만했다.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는 대동계 사람들이 나가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다. 대동계는 무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거기에 ‘천하는 공물’이라는 말을 하고 다닌 인물이 정여립이기도 했다.

 

정여립은 당당하게 떠들고 다녔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세상은 왕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논리다. 모두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라는 주장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고 정통 주자 성리학의 입장에서는 일탈한 사상의 소유자였다.

 

또한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뜻으로 ‘목자는 망하고 전읍은 흥한다’는 ‘목자망 전읍흥’이라는 동요를 옥판에 새겨서 지리산 석굴에 감추어 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했다.

 

조선은 발칵 뒤집혔다. 살얼음 위를 걷는 살벌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정여립이 나라를 뒤엎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조선의 왕에게 전달되자 조선의 왕은 어느 때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뜨겁게 만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정리해 나갔다.

 

정리의 책임자로 정철을 세웠다. 정철은 극악한 사내였다. 정철은 선조의 마음을 읽었고 자신의 붕당에 유리하게 작동시키기 위해서 사건을 확대해 나갔다.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한 문서와 편지들을 샅샅이 검토해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리고 과감하게 처단했다. 정철의 목표는 서인에 의한 동인의 제거였다.

 

많은 사람이 문초 과정에서 사망하는 무서운 형국이 펼쳐졌다. 3년 동안 죽은 사람의 숫자가 천명에 달했다. 가혹하다고 하는 조선 4대 사화를 다 합한 500명보다도 많았다. 무려 두 배가 넘었다. 정여립보다도 정철은 두려운 존재였고, 선조는 더 무서운 인물이었다.

 

정철의 칼을 피한 것이 류성룡이었다. 류성룡이 속했던 동인의 상당수가 죽거나 귀양 보내졌다.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고, 같은 동인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 류성룡이었다.

 

권력은 바람과 같아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정철이 속한 서인이 조정을 장악했다. 하지만 권력은 바람과 같아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다시 사건이 터졌다.

 

왕세자 책봉 문제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선조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 세자를 정하자고 하면 왕의 무능을 이야기하는 듯했고, 늙어서 물러나라는 느낌도 들어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정사에 책임을 쥔 세 정승이 나서기로 했다. 왕이 직접 왕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삼정승이 공동으로 제안하자고 약속했다. 삼정승은 광해군으로 세자를 정하자고 약속했다. 다음날 왕에게 이야기를 꺼내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약속을 깬 인물이 있었다. 영의정 이산해였다. 이산해가 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당시 좋아하던 후궁으로 신성군이라는 아들을 낳은 인빈의 남동생인 김공량을 불러 말했다.

 

“지금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신성군 모자와 너를 죽이려고 한다.”

 

김공량은 깜짝 놀랐다. 김공량은 누나인 인빈에게 달려가 그대로 전했다. 인빈은 놀라 울면서 밤중임에도 선조를 찾아가 전했다. 선조는 인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있냐는 반응이었다.

 

삼정승이 함께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자는 의견을 왕에게 약속한 다음 날 이산해는 나오지 않았다.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입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정철과 류성룡 둘이서 선조에게 세자 책봉 문제를 말하게 되었다. 성질 급한 정철이 먼저 세자를 세울 것을 말하자 선조는 어제 일이 생각났다.

 

선조는 놀라며 ‘사실이었구나!’ 생각했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데 경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가?”

 

정철은 놀라 허둥지둥 물러 나왔다. 류성룡도 감히 더 말하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정철은 철저하게 서인의 입장에서 동인들을 처단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머리를 맞대고 정사를 의논해야 하는 사람으로 만나야 했다. 적을 만드는 것은 나의 함정을 만들 사람 하나를 키우는 것과 같다. 이산해의 이간질에 의해 정철의 방자함이 알려지자 일이 일어났다. 정철 죽이기에 돌입했다. 정철 죽이기의 주동자는 이산해였고, 만류한 사람이 류성룡이었다. 정철이 귀양 가고, 서인들이 대거 탈락하고 동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귀양가있던 정철은 선조의 부름으로 다시 정계에 돌아오게 되었다. 정철과 이산해, 그리고 류성룡은 다시 전시조정에서 만나서 정사를 함께 논의하고 이끌어나가는 사람으로 만났다. 정치인은 결국 정치 마당에서 만나게 되어있다. 정치인이 정치인을 보호해야 함에도 서로 죽일 듯이 싸웠다. 피해는 고스란히 정치인들에게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정적을 만드는 것은 자객 하나를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류성룡은 결단력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반대파를 척결하지 않았다. 반대파도 결국은 조정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을 알았다. 선조에게는 다른 두 파가 있어야 정치가 가능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류성룡은 조선의 왕을 설득할 수는 있어도 왕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왕조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류성룡은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끝내 자리를 지켰다. 절대권력을 가진 존재에게 밉보이는 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올 수 있었다. 결국 류성룡이 택한 것은 중간지대였다. 현명했고, 냉철했고, 화합을 할 줄 아는 명재상이었다. 미워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순간 언젠가 다시 적이 자신을 겨누는 화살이 된다.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이 정치다. 정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 간의 조정으로 새로운 길은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대비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지 마라

평화를 누리려면 한편으로는 전쟁을 준비하라

평화는 전쟁 때 지키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평화 시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평화 시에 평화를 누리는 방법은 전쟁 준비가 완성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평화는 강한 자의 전리품 같다. 약자에게는 평화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강자가 평화를 선물하듯이 베풀어 주었을 때 가능한 것이 평화다. 그것은 굴욕의 평화다. 복종의 평화다.

 

조선의 평화가 200년 동안 지속된 것은 굴욕의 평화였다.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신 보답이 평화였다. 다시 말하면 알아서 떠받들어 모시는 조선을 명나라가 가만 보고 즐긴 것이 조선의 평화였다. 조선의 평화가 깨질 때는 명나라에서 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엄포나 나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할 때였다. 치욕의 평화였고, 독립된 평화가 아니었다.

 

평화는 강자의 향유물이지 약자의 향유물이 아니다

전쟁이 터졌다. 임진왜란이었다. 200년의 평화, 건국 200주년을 준비하던 왕조국가인 조선에게 시련이 시작되었다. 우습게 보았던, 하찮게 여겼던 일본의 침공은 강하고 빨랐다. 또한 대규모였다. 어느 것 하나 정비되지 않았고 어느 것 히나 준비되지 않은 조선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울어가는 나라였다. 세종을 정점으로 상승하던 기운은 이미 기운지 오래되었다. 상공업은 죽어서 겨우 굴러가는 상황이었고 무역이 없어 물산은 부족했다. 외국으로 유학 한 명 보내지 않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성리학 중에서도 주자학을 신봉한 대가는 컸다.

 

군사력은 더욱 하강곡선을 크게 그리고 있었다. 군사와 군량과 군수품이 명부에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없었다. 활과 화살은 물론 화포도 없었다. 심지어 있어야 할 사람도 없었다. 사람도 허위로 작성해서 군영을 운영해 오고 있었다. 모든 게 허위였다. 나라는 나라가 아니었다. 안으로 곪고 있었다. 곪아서 터져 나갈 지경이었지만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상황까지 와 있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닌 농사와 군직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병사들의 훈련 상태는 형편없었다. 그리고 병영과 수영에도 제대로 된 병사가 얼마 없었다.

 

류성룡은 준비했다

류성룡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군 체계를 고치려 했다. 조선은 두 가지 군사조직 운영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는 진관체제와 제승박략이었다. 진관체제는 지역에 마련된 군사 조직을 상시 운영하는 체계였고, 제승방략은 중앙 조정의 지시에 의해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멀리 떨어진 방어지역으로 파견되는 형태였다. 아쉬운 점은 타지역에 있던 장수가 급박한 상황에 현장에 도착하여 병사를 모집하고 지형지물을 파악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 하더라도 통제력을 갖기 어려웠고 인화 단결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중앙에서 내려보낸 장수가 한 번 패하면 끝장이었다. 또한 통솔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제승방략에 따라 백성들에게 집결하라고 명해도 모두 도망가 버리고 모일 백성이 없었다. 류성룡은 강하게 진관체제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정 조선은 군대가 없는 나라였다. 군대가 없는 나라를 가만두는 인접국이 있다면 그도 이해하기 어렵다. 국제 관계는 먹고 먹히는 관계다. 선린과 우호는 평화 시에, 그리고 힘이 동등하거나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 가능하다. 힘이 비슷할 때는 서로 두려워 공격할 수가 없다. 문제가 생겨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힘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 때는 복종으로 평화가 유지된다.

 

하지만 서로 갈등이 생길 때 강자는 약자를 당연하게 굴복시킨다. 굴복하려 들지 않으면 당연히 분쟁을 일부러 만들고 분쟁을 빌미로 공격한다. 스스로 강자라 인식할 때 약자를 공격한다. 임진왜란은 그렇게 일어났다.

 

전쟁은 강자의 도발이다. 약자가 전쟁을 일으키는 적은 없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약자가 평화를 향유하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약자의 평화는 언제고 깨질 수 있다. 적어도 내 나라만은 유지할 수 있는 강군을 길러내야 한다. 류성룡은 문관이었지만 무관의 일까지 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계획까지 만들었고 장수들을 추천했다. 조선의 제도를 고치고 새로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현장을 찾아가 장수들로 하여금 무기고와 군사 수를 확인하도록 했다. 그리고 상벌을 주었다. 하지만 한 개인의 힘으로는 전쟁 준비가 완성되지 못했다. 류성룡이 뼈아프게 아쉬워 한 부분이었다.

 

결단의 순간에 망설이지 마라

대가가 일보라도 우리 땅을 넘어서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대가가 일보라도 우리 땅을 넘어서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절박한 상황에 선 임금에게 류성룡은 절규하듯 말했다. 대가는 임금의 가마였다. 임금의 가마가 조선을 벗어나 명나라로 가려는 것을 막아선 사람이 류성룡이었다. 나라를 버리려는 임금에게 류성룡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다. 눈물로 막아섰다. 조선을 가장 먼저 포기한 인물은 조선을 다스리던 왕, 선조였다. 1592년 5월 1일이었다. 일본군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4월 30일에 한양을 버리고 쫓기는 신세로 도망을 시작한 선조가 파주에 있는 관서인 동파관에 도착했다.

 

조선의 왕에게는 생각하는 곳이 있었다. 압록강 건너 요동이었다. 국경을 넘어 자신부터 살고 보자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선조에게는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자존감도 없었다. 사는 것이 먼저였다. 의주로 피난 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수차례 요동 총독에게 사람을 보내서 요동으로 망명할 것을 요청했다. 조선의 왕의 도주 속도가 너무 빨라 오히려 조선 왕의 의도를 의심할 정도였다. 요동에서는 일본과 합세해서 중원을 침공하려는 걸로 의심했다. 요동으로 오려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라는 통보가 왔다. 그리고 양쪽 강가에 정박하고 있는 배를 전부 요동 쪽으로 가져가 버렸다. 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전시에 마련된 임시내각에서도 의견은 분분했고 정파 간의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국가의 위기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웠다.

 

“아니 되옵니다. 대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

 

류성룡이 월경을 반대했다.

 

왕이 류성룡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힘을 주어 말했다.

 

“내부 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내부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는 것을 말한다. 내부란 명나라로 도주해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류성룡이 다시 힘을 주어 반대했다. 평소의 류성룡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주장하지 않는 평소의 태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류성룡의 단호한 모습에 놀랐다. 백성을 버리고 자신만 살겠다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급할수록, 절박할수록 원칙과 소신이 필요하다

급하다고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전부를 잃을 수 있다. 국왕이 서슬 같은 냉정함으로 상황을 이끌어가야 조정 대신이 따르고, 장수들이 따르고, 백성들이 따르게 된다. 먼저 도망가고, 어찌하면 좋겠느냐며 어린아이같이 칭얼대는 왕의 모습은 한심스러웠다.

 

정치는 명분을 잃으면 추진력을 잃어버린다. 또한 용기를 잃으면 무엇도 이루어낼 수가 없다. 최고 지도자인 왕이 자멸해 버리는 상황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류성룡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명분이 필요했고,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수들에게 할 말이 있고, 조선의 장수와 병사들이 싸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었다. 또한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마음을 불러 일깨울 수 있는 최소한의 결기였다.

 

평양성을 지켜야 합니다

류성룡은 평양성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 평양성을 지키고 있으면 명의 원군을 기다릴 수 있었다. 평양성을 지킬 수 있으면 조선의 장수들과 조선의 백성들에게 함께 싸울 것을 내세울 수가 있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왕이 직접 나서서 평양성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면 무엇을 해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줄 수 있고, 적과 대치해서 싸우고 있는 장수들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병사로 나서라고 소리칠 수 있고, 백성들이 전투를 지원할 수 있게 하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류성룡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왕은 먼저 평양성을 버리고 다시 더 먼 곳으로 도주를 시작했다. 평양성을 지키라고 당부하면서 조선의 왕은 다시 도망했다. 평양성을 지킬 것을 명받은 장수도 왕과 같이 평양성을 버렸다.

 

류성룡의 외침은 왕의 비겁함으로 허사가 되었지만 압록강을 건너 나라를 버리는 것까지는 면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은 평양성을 점령한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정착이었다. 평양성을 점령하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평양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한 조선의 왕에게 소수 정병을 보내 추격했다면 조선의 왕은 잡혔거나 아니면 압록강 너머로 도망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의 양상은 확실하게 바뀔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왕을 잡았다면 바로 강화 협상과 더불어 조선은 일본군에 점령당했을 것이다. 명나라로 도망을 했다고 해도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문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추격은 거기까지였다. 반격의 기회가 조선에 주어지는 기회였다. 명분을 얻어 다시 조선은 힘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류성룡의 혜안이 빛났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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