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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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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반일 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4월 | 336쪽 | 18,000원

그림2 (3).jpg
북집


■ 책 소개

 

한일 관계 전문가 호사카 유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독도 문제에 관한

『반일 종족주의』 저자의 왜곡과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계 한국인이다.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저자는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서 나고 자라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한국으로 건너와 한일 관계 연구를 시작했고, 한국 생활 15년이 지난 2003년에 귀화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이처럼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까닭은 매우 명확하다. 한일 관계 연구를 30년 넘게 지속해온 학자로서 ‘가해자인 일본이 역사 앞에 진실해지지 않는 한, 한국과 일본의 화해나 공동 번영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영훈 등이 공동 집필한 책 『반일 종족주의』에는 너무나 많은 왜곡과 오류가 드러나 있었다. 더구나 『반일 종족주의』 속에는 역사적 진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부분이 매우 많았다. 이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반일 종족주의』의 왜곡과 오류를 바로잡으며, 정치적 논리를 떠나 역사적 진실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 저자 호사카 유지

저자 호사카 유지는 195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교 공학부 졸업 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한일관계 연구를 위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 체류 15년 만인 2003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했다. 2011년 독도 공로상, 2013년 홍조근정 훈장, 2018년 독도평화대상 특별상 등을 받았다.

 

외교부 독도정책위원회 자문위원과 독립기념관 비상임이사,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KBS 객원 해설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 경상북도 독도위원회 위원,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상임이사,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편집위원, 동아시아일본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대한민국 독도 교과서』 『독도, 1500년의 역사』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 『대한민국 독도』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 등이 있다.

 

현재 세종대학교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 독도종합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차례

머리말

프롤로그

 

제1부 강제징용 문제에서 드러난 ‘노예근성’

제1장 조선인들이 강제연행된 일본 탄광의 실상

죄수를 광부로 사용한 일본 탄광│일본 탄광에서의 노무관리 실태│미이케탄광 폭동 사건과 다수의 도주자│미이케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

 

제2장 강제징용의 진실은 무엇인가

조선인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계보│강제연행을 자발적인 선택으로 왜곡하는 이우연│‘관 알선’이라는 강제연행│조선인들의 도주는 노무 동원이 자발적이었다는 증거?│『특고월보』가 증명한 조선인 노무자 혹사와 학대│조선인들이 저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한 차별 구조│탄광에서의 작업상 민족차별을 부정할 수 있는가│임금 차별은 없었는가│가족 송금과 조선인 탄광부의 임금 수준│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제2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최전선 성노예 제도

제1장 위안부 관련 문서의 중요 부분을 은폐하는 사람들

미군의 ‘위안부’ 심문 보고서 원문의 중요 부분을 은폐해도 되는가│동남아 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들

 

제2장 그릇된 ‘위안부’ 논리를 해부하다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을까│일본군 ‘위안부’의 본격적 동원의 계기│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 공창제와 ‘위안부’│일본군 ‘위안부’ 동원 시스템│감금 상태에 놓인 일본군 ‘위안부’│공녀와 공창제 그리고 ‘위안부’│호주제 가족 윤리와 성문화가 위안부 제도로 연결되었는가│원래 매춘부였던 여성들을 전쟁터로 보냈는가│해방 후 한국의 위안부│기지촌 여성과 일본군 ‘위안부’

 

제3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가 알려주는 ‘성노예’의 실태

방패사단 ‘위안부’였던 문옥주에 대한 왜곡│위험 지역에서 탈출한 문옥주│군속으로 근무한다는 감언에 속아 버마로│최전선 아카브에서의 ‘위안부’ 생활│조선으로의 귀국을 중지한 문옥주│랑군회관으로 돌아간 문옥주│군법회의│해방 후의 문옥주│이영훈이 왜곡·은폐하는 문옥주의 진심│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의 전쟁범죄

 

제4장 『반일 종족주의』의 ‘위안부’ 관련 주장 비판

잘못 쓴 위안부 인원│일본군 ‘위안부’의 총수 문제│요시다 세이지에 대해│과연 성노예였던가?│해방 후 위안부 문제는 40여 년 동안 없었을까│정대협을 공격하는 주익종

 

제3부 일제강점은 원천적으로 범법 행위였다

제1장 독도에 대한 거짓 주장들

독도에 대한 무지│『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우산도는 독도│조선고지도와 안용복 사건│신경준과 조선의 독도 인식│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관한 황당무계한 거짓말│석도가 독도다│일본의 독도 편입과 울도군수 보고서│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인 증거│러스크 서한과 독도│이승만 라인과 현재의 독도│이영훈의 독도 인식의 잘못

 

제2장 일제강점이 원천적으로 무효인 이유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먼저 위안부 합의를 깬 쪽은 일본이다│일제강점은 원천적으로 범법 행위였다

 

맺음말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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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유지 지음/봄이아트북스/2020년 4월/336쪽/18,000원


강제징용 문제에서 드러난 ‘노예근성’

강제징용의 진실은 무엇인가

조선인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계보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연행' 시기가 도대체 어느 때를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시기는 1939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5년 8개월 동안이다. 그리고 이 기간은 다시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1939년 9월부터 시작된 조선인 '모집' 기간이고, 두 번째는 1942년 2월부터 시작된 ‘관 알선’ 기간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의 ‘징용’ 기간이다.

 

그동안 조선사 연구자 박경식이 1965년 일본에서 펴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 토대가 되어, 한국의 주류 연구자들은 이 세 시기 모두 일본에 의해 조선인들이 강제로 연행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바로 이 세 시기 모두를 ‘조선인 강제연행’ 기간으로 보는 견해가 한국 사람들의 주된 생각이다. 

 

그런데 2000년 일본의 우파 논객으로 알려진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가 ‘강제연행설 허구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실제로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용'이 실시된 시기는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약 8개월의 ‘징용’ 시기뿐이고, 1939년 9월부터 시작된 ‘모집’과 그 이후에 이어진 ‘관 알선’은 강제연행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일본행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우연은 이와 같은 일본 우파 논객들의 ‘강제연행설 허구론’을 수용한 뒤, 이에 자신의 연구를 추가해 나가는 입장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우연은 ‘징용’ 시기에 일본으로 연행된 조선인은 10만 명 이하였다고 주장한다.

 

결국 조선인 강제연행을 말할 때 이와 같은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강제연행설 허구론’은 1997년 일본에서 결성된, 일본 우익의 역사관을 대표하는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과 그 동조자들의 주장을 계승한 것이다.

 

‘조선인 강제연행설 허구론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937년 9월부터 시작된 '모집'과 그다음 단계인 '관 알선'은 강제 연행이 아니었다. 

(2) 1944년 9월부터 시작된 '징용'으로 조선인들이 강제로 작업장으로 연행되었지만, 당시에는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로 '징용'되어 민족적 차별은 없었다.

(3) 노동 내용, 작업장에서의 취급, 정해진 임금 등에서 민족차별이 없었다.

(4) 기타

 

이처럼 '조선인 강제연행설 허구론자'들은 강제연행과 민족적 차별 모두를 부정한다. 일본 우익의 논리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이우연은 1939년 9월부터 실시된 '모집'과 1942년 2월부터 실시된 '관 알선'은 강제징용이 아니었고 “법률적인 강제성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이다. 이우연은 '법률적 강제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은 서류상 강제는 아니었다는 뜻이고, 조선인들이 계약상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의 주장대로 계약상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갔다고 할지라도, 일본의 작업장에 도착한 이후는 대부분의 조선인이 강제 노동에 시달린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우연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법률적 강제성'이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대단히 작위적이면서도 교묘한 기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탄광에서의 작업상 민족차별을 부정할 수 있는가

이우연은 위와 같이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보다 갱내의 위험한 곳에 배치되어 위험한 노동에 시달렸다는 민족차별론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우연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7월 31일자 '홋카이도 각 탄광별 노동자 수 조사' 결과에서 뽑은 대탄광의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 갱내 취업률 상황표를 보면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 노동자보다 압도적으로 갱내 취업률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처음 취업시킬 때부터 조선인을 갱내 노동자로 취업시킨 비율이 높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탄광 사고가 주로 갱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보다 압도적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홋카이도의 대탄광에서 조선인의 갱내 취업자 비율이 72.5~94.4%인 데 비해 일본인의 갱내 취업자 비율은 31.1~56.1% 정도이다. 그러므로 탄광에 취업할 때부터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대략 2배 혹은 그 이상의 비율로 갱내에서 노동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우연은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탄광에서의 사망률이나 부상률이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훨씬 높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943년에 일본인은 60%가 갱내부였는데, 조선인은 무려 92%가 갱내부"였다는 점, "가장 위험한 작업을 맡은 조선인들의 비율은 일본인들보다 2배나 높았고, 조선인의 사망률이 일본인의 2배에 가깝게 된 것"도 인정했다.

 

그런데도 이우연은 민족적 차별을 부정한다.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보다 위험한 노동을 한 이유로 그는 다음과 같이 일본의 전쟁 수행을 거론한다.

 

"군인으로 징병된 일본인들은 모두 청장년층이었고, 이것은 탄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탄광으로부터 징병된 일본인들은 갱외부보다는 갱내부, 갱내부 중에서도 비교적 강한 완력을 갖고서 더 위험한 작업에 종사했던 채탄부·굴진부·지주부 출신자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이우연은 전쟁터로 징병된 일본인 광부들이 주로 갱내부였고, 그것도 더 위험한 작업을 하는 채탄부·굴진부·지주부 출신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이런 일본인들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모집', '관 알선', '징용'이라는 방법으로 동원되어, 결과적으로 전쟁터로 징병된 일본인 노동자가 맡았던 위험한 갱내에서의 일을 맡게 되었다고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일본에서 징병할 때는 연령으로 정했을 뿐 체력으로 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광부들을 골라서 일제가 징병했다는 이야기는 이우연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모집'이나 '관 알선' 때는 조선인들을 속여서 취업 사기로 연행했고, '징용'했을 때도 일본인과 차별 대우를 하면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조선인에게 위험한 노역을 시킨 것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최전선 성노예 제도

그릇된 ‘위안부’ 논리를 해부하다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을까

이영훈의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메시지 중 하나는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가 새롭게 군 위안소를 설치했다기보다 기존의 성매매 업소가 그대로 일본군의 군 위안소로 바뀐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메시지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된 여성들은 원래부터 성매매 업소에서 일한 성매매 여성들이었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영훈의 두 번째 메시지는 일제강점기가 된 후 빈곤계층의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기생집으로 팔렸고, 그 연장선상에서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영훈의 세 번째 메시지는 조선 여성들이 업자들의 감언에 속아 '위안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흔히 있던 일이고, 일본 정부나 일본군의 책임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이영훈의 일본군 '위안부', 특히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주된 세 가지 메시지다.

 

이영훈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일본 정부나 일본군은 '위안부'를 강제연행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강제연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모두 업자들에게 있으며, 대다수의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시작한 원래부터 매춘부였던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은 일본의 우파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 그리고 일본 논리를 따르는 소위 ‘신친일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세 가지 논리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사실 인식에 문제가 있거나, 고의로 왜곡하는 그릇된 자세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의 연장선상에서 생긴 제도가 아니라, 여성들을 취업 사기와 납치 등으로 강제연행해 ‘위안부’로 만든 새로운 제도였다.

 

그리고 조선 빈곤층의 가부장적 권위자인 아버지가 딸을 기생집으로 팔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딸들이 '위안부'가 되었다는 논리도 일부의 이야기를 전체인 것처럼 확대해석한 결과다. '위안부'가 된 여성 중에 학교 선생님 등 빈곤층이 아닌 사람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명쾌하게 설명을 못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성들을 모집한 업자들에게 강제연행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업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에게 여성들의 모집뿐만이 아니라 전쟁터에서의 군 위안소 경영까지 맡긴 것이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라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누락한 논리에 불과하다. 결국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나 일본 우파는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기 위한 결함투성이의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감금 상태에 놓인 일본군 ‘위안부’

이영훈은 한국의 1945년 해방 후 이야기를 하면서 해방 후 성매매에 종사했던 한국 여성들은 당시 제조업에 종사했던 한국 여성들보다 소득이 높았으니 “최빈곤 계층의 여인들이 해마다 1만 명 이상이나 위안부가 되었던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악덕 포주의 위안부에 대한 노예적 지배는 일선 경찰과 뇌물로 이어진 결탁 하에서 공공연히 자행”되었다고도 서술했다.

 

이영훈은 1945년 이후 성매매업에 종사한 여성들에 대해 ‘위안부’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위안부’가 일제강점기뿐만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흔하게 존재했다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 놓으려고 한다. '위안부'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해방 후 한국의 성매매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 처지와 비슷했으며, 일본군 '위안부'가 한국 역사상 해방 후에도 한국에 존재했으므로 일본군 '위안부'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고 강변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1942년 5월경 버마 랑군(현 양곤)에 종군기자로 부임한 오마타 유키오(小俣行男)가 1967년 출판한 전쟁 체험담 『전쟁터와 기자-일화사변, 태평양전쟁 종군기(戰場と記者一日華事変, 太平洋戰争從軍記)』에서 랑군의 위안소에서 만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아침에 도착한 화물선으로 조선 여자들이 40~50명 상륙했다고 듣고 나는 그녀들의 숙소로 향했다.)

 

내 상대는 23, 24세 정도의 여자였다. 그녀는 일본어가 능숙했고 공립학교 교사였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이 왜 이런 곳에 왔나요?”라고 묻자 그녀는 정말 억울하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는 속았습니다. 도쿄에 있는 군수 공장에 간다는 모집이 있었습니다. 저는 도쿄에 가보고 싶어서 지원했어요. 그래서 인천 앞바다에 머물던 배를 탔는데, 도쿄로 가지 않고 쭉 남쪽으로 가 맨 먼저 도착한 곳이 싱가포르였어요. 거기서 여자들이 절반가량 내렸고 우리는 버마까지 연행되었습니다. 이제 걸어서 돌아갈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념했습니다. 그렇지만 불쌍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입니다. 16, 17세 아이들이 8명 있습니다. 이런 장사는 싫다고 울어요. 그 아이들만이라도 구제받는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생각한 끝에 헌병대에 호소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헌병이 과연 도와줄지 확신은 없었다. 결국, 8명의 소녀는 헌병대에 도움을 청했다. 헌병대는 곤란해했지만, 소녀들은 장교 클럽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교 클럽이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전쟁터의 상식이다. 그 후 소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위의 증언은 도쿄에 있는 군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속여 조선 여성들 40~50명을 싱가포르와 버마의 위안소로 강제연행한 사례를 확인해준다. 종군 기자였던 저자가, 속임을 당해 위안소로 연행된 조선 여성들과 소녀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쟁 체험기를 보면 ‘최빈곤층’이 아닌 여성들도 일본군 ‘위안부’가 되기를 강요당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영훈의 논법으로는 심한 빈곤이 성매매 여성이 되는 이유이므로, 결국 그들은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했다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독자들을 현혹한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측의 주장과 같은 논리다. 

 

원래 매춘부였던 여성들을 전쟁터로 보냈는가

이영훈이 주장한 내용은 업자들이 자발적으로 군 위안소를 차렸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와 달리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군 위안소 설치를 위해 업자들을 선정한 것이다. 그리고 1944년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를 보면, 조선에서도 조선총독부가 주도해서 업자들을 선정해 여성들을 모집하게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과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보통 매춘업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일본 정부와 일본군, 조선총독부가 유곽업자 중 신원이 확실한 자를 선정해 여성들을 비밀리에 모집하게 하여 그들이 여성들을 현지 위안소로 인솔한다는 내용이 이 자료로 확인된다. 그리고 인솔자는 그대로 현지에서 포주가 되었다. 아울러 이것은 모두 '극비리'로 진행해야 한다는 지시가 적혀 있다.

 

이 문서에는 모집업자이자, 포주가 되는 사람에게는 관계 방면에 연락해 편의를 제공한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바로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만들어낸 '위안부 동원 시스템'이다. 이 문서는 이영훈의 핵심적인 주장을 모두 무너뜨리고 있다.

 

그리고 만 21세 이상의 원래 창부였던 여성을 '위안부'로 해외로 보낸다는 점과, 여성들이 모두 관할 경찰서장의 면담을 받아 도항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내무성 통첩’의 내용은 형식적인 것이어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940년 외무성이 발표한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위안부' 도항에 변칙적인 방법이 동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지 헌병대가 군속, 군 고용인이 아닌 자(주로 특수 부녀)에 대해 증명서를 발급하여 이것으로 지나로 도항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소정대로 영사관 발급의 증명서로 진행시키도록 하기 바란다.”

 

원래 ‘위안부'를 전쟁터 현지로 도항시킬 경우, 현지 일본군 헌병대가 현지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것을 검토한 영사관이 증명서를 발급해야 했다. 그 후에는 일본이나 조선 내에서 중국으로 도항하려는 여성들이 현지 영사관이 발급한 증명서를 관할 경찰서에 제출하고, 경찰서장의 면담을 받아야 했다. 이를 모두 통과한 뒤 경찰서장이 여성들에게 발급해준 증명서가 곧 도항 증명서로 인정되는 제도였는데, 이 원칙이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음을 이 문서가 보여주고 있다. 

 

문서상 확인이 된 가장 어린 ‘위안부’는 15세였다. 당시 일본은 한국과 똑같이 '세는 나이'로 나이를 표기했는데, 여기에서 15세라고 하면 만 13~14세다. 일본군 '위안부' 중에는 만 21세 미만의 여성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본 정부나 일본군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만 21세 이상의 여성들을 데려간다는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다음은 그 사실을 확인해주는 필리핀 일로일로 위안소의 성병 검사 기록이다. 필리핀 일로일로 환자요양소 기록에는 10명 중 8명이 21세 미만이고, 16세도 2명이 보인다. 일로일로 제2위안소 기록에는 19명 중 6명이 21세 미만이고, 최연소인 15세도 확인된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이나 조선 내의 창부만을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의 연장선상에서 생긴 제도도 아니었다.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라는 일왕으로 직결하는 국가 기관들이 '위안부' 강제연행을 주도하며 취업 사기 등으로 연행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 조선인 여성들을 해외의 최전방 전선으로 데려갔다. 

 

『반일 종족주의』의 ‘위안부’ 관련 주장 비판

잘못 쓴 위안부 인원

이영훈은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확실하지 않은 숫자를 늘어놓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위안부’의 인원수와 관련된 숫자다. 이영훈은 “위안부는 대개 병사 150명당 1명의 비율로 충당”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병사 100명당 ‘위안부’ 1명의 비율이라는 문서가 존재한다. 1939년 4월 15일자 육군성 과장 회의 문서 ‘가네하라 세쓰조(金原節三) 업무일지’에는 “성병 예방 등을 위해 병사 100명당 1명의 비율로 위안부를 수입한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1940년 10월 15일자 ‘다카모리(高森)부대 특수위안 업무 규정’에도 “위안부는 황군 100명에 대해 1명의 비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네하라 세쓰조 업무일지’에 따르면 병사 100명에 위안부 1명이라는 비율이 목표치이고, ‘다카모리부대 특수위안 업무 규정’에는 실제로 병사 100명에 위안부 1명을 배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영훈은 근거 없이 “병사의 위안소 방문을 월 1회”로 계산해서 “노동 강도는 하루 5명”이라고 거짓말을 썼다. 실제로는 병사들이 대략 일주일에 한 번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게 배정되었다. 거듭 인용한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에 따르면 군 위안소에는 다음과 같은 ‘이용일 할당표’가 존재했다.

 

일요일 : 제18사단 사령부

월요일 : 기병대

화요일 : 공병대

수요일 : 휴업일, 정기건강진단

목요일 : 위성대

금요일 : 산포병대 

토요일 : 수송대

 

위의 할당표를 보면 병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장교들은 매일 밤 위안소 이용이 가능했다. 문옥주의 애인인 야마다 이치로도 일주일에 한 번 문옥주를 만나러 갔다.

 

이영훈은 “1937년 일본 오사카의 두 유곽 구역에서 창기 1인당 하루 유객의 수는 2.5명”이라고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민간의 매춘부보다 노동 강도가 높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병사 150명에 ‘위안부’ 1명의 비율로 병사가 월 1차례 위안소를 방문했을 때의 경우다. 

 

결국, 병사 150명에 '위안부' 1명의 비율로 일주일에 한 번 위안소를 이용했다면 각 '위안부'들은 하루 2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위안부' 1명당 병사 100명의 비율이라면 병사 150명 비율의 3분의 2 정도로 계산해서 '위안부'들은 하루에 약 14명 정도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것도 토요일이나 다음 날 전투가 예정된 경우에는 한 명의 '위안부' 앞에 병사들의 긴 행렬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경우에는 하루에 70명 이상 병사를 상대해야 하는 그야말로 '성노예' 지옥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조선 공창제의 연장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생명의 위험과 여성의 한계를 넘는 초고강도 노동 때문에 감금 상태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존재였다.

 

이영훈은 위안부 제도의 수칙이 1916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공창제와 거의 같다면서 “위안부제가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제”임을 몇 번이나 강조한다. 그리고 1937년 이후의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 내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발단은 1937년 말 상하이의 일본 현지 군이 독자적으로 위안소 개설을 결정한 뒤, 선정한 업자들을 일본과 조선에 보내 작부 3,000명을 모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업자들은 여성들을 작부 명목으로 모집했고, 계약 관계는 업자(포주)와 여성 간의 계약이라는 공창이 아닌 피고용원 계약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 내무성은 1938년 3월 '내무성 통첩'을 하달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업자들을 설득해 어디까지나 업자들의 자발적인 의사로 위안소를 경영한다는 형식을 취했다. 그 결과 '위안부'는 포주의 피고용원이라는 위장된 형식을 취하게 되었고, 그녀들은 해외로 연행되었다. 그 배후에는 항상 일본군,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가 존재했는데, 모두 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교묘히 만든 것이다. 업자들은 배후의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를 믿고, 일본군과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는 업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이렇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버려진 존재로서의 일본군 '위안부’들이 생긴 것이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조선 내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에 불과하다며 조선 내의 군 위안소만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본질은 일본이나 조선, 대만 외의 외국 격전지에 여성들을 보냈다는 데 있다. 그런 위험한 지역으로 원래 성매매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일부러 갈 리는 없다. 훨씬 안전한 곳에서 생활하던 여성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격전지이자 최전선을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다. 결국 매춘에 무지한 여성들을 취업 사기로 속여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이영훈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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