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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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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2

세계의 책 속에 피어난 한국 근현대
최종고 지음 | 와이겔리 | 2019년 10월 | 328쪽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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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우리의 정치, 역사, 문화, 일상을 냉철한 분석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담아낸

이방인들의 책을 통해 ‘세계 속의 한국’을 발견한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에 관해 쓴 책과 기록이 있는 곳이라면 무작정 찾아 나서기도 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아 2주간을 머무르며 한국의 기록을 체험하고 조사했으며,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하임 포톡의 한국전쟁을 토대로 쓴 소설을 찾기 위해 필라델피아 도서관을 찾아 그의 저서와 기록들을 조사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위해 투쟁한 글렌 페이지, 미국 외교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 『한국 찬가』를 쓴 게오르규, 남북을 방문한 루이제 린저, 박대인 목사 에드워드 포이트라스, 이승만의 해외 대변인 올리버 등과는 개인적인 만남과 교류를 통해 그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이 책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에 담아냈다.

 

■ 저자 최종고

1947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모교 서울법대에서 33년간 교수로 법사상사를 가르쳤다.

 

많은 학술서를 저술하여 2012년 삼일문화상을 수상하였다. 2013년 정년 후에 문학은 인생의 대도(大道)라는 생각으로 시인으로, 수필가로 등단하고 『괴테의 이름으로』(2017) 등 시집과 문학서를 내었다. 현재 <한국인물전기학회>와 <한국펄벅연구회>를 운영하고, <국제PEN한국본부>, <공간시낭독회> 회원이다.

 

■ 차례

머리말 | 세계의 명저들 속에서 우리 문화를 발견하다

 

chapter 36 | 이탈리아 외교관 출신 수집가

카를로 로세티 Carlo Rossetti

 

chapter 37 | 러일전쟁을 취재한 미국 소설가

잭 런던 Jack London

 

chapter 38 | 미국 여성 선교사 작가

엘라수 캔터 와그너 Ellasue Canter Wagner

 

chapter 39 | 독일에 한국학을 심은 신부 출신 교수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Ludwig Otto Andreas Eckardt

 

chapter 40 | 그림으로 쓴 영국 여성 여행작가

엘리자베스 키스 Elizabeth Keith

 

chapter 41 | 한국민예를 사랑한 일본 도예가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chapter 42 | 한국동화를 지은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Frank William Schofield

 

chapter 43 | 3·1운동 현장을 취재한 미국 기자

나다니엘 페퍼 Nathaniel Peffer

 

chapter 44 | 한국을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로 부른

펄 사이덴스트리커 벅 Pearl Sydenstricker Buck

 

chapter 45 | 괴테 전기가이자 이미륵의 친구

리하르트 프리덴탈 Richard Friedenthal

 

chapter 46 | 한국의 수난을 겪고 쓴 독일 수도자

암부로시우스 하프너 Ambrosius Hafner

 

chapter 47 | 영친왕과 공저를 집필한 영문학자

레지날드 호레이스 블라이스 Reginald Horace Blyth

 

chapter 48 | 문학으로 한국을 사랑한 인도 외교관

쿠마라 파드마나바 시바상카라 메논 K. P. S. Menon

 

chapter 49 | 조선왕조의 마지막 며느리

이방자 李方子

 

chapter 50 | 한국문화를 사랑한 인류학자

코넬리우스 오스굿 Cornelius Osgood

 

chapter 51 | 김산과 「아리랑」을 함께 쓴

님 웨일스(헬렌 포스터 스노우) Nym Wales, Helen Foster Snow

 

chapter 52 | 한국전쟁을 소설로 알린

제임스 알버트 미치너 James Albert Michener

 

chapter 53 | 몽고전란을 소설로 그린

이노우에 야스시 井上靖

 

chapter 54 | 미국에 한국학을 심은 맥큔 부부

조지 맥아피 맥큔 George McAfee McCune

에블린 베커 맥큔 Evelyn Becker McCune

 

chapter 55 | 이승만 대통령의 해외 한국 대변인

로버트 타벨 올리버 Robert Tarbell Oliver

 

chapter 56 | 분단 한국의 실상을 껴안은

루이제 린저 Luise Rinser

 

chapter 57 | 『25시』 이후의 희망 코리아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 Constantin Virgil Gheorghiu

 

chapter 58 | 한국 여배우와 결혼한 인류학자

유진 I. 크네즈 Eugene I. Knez

 

chapter 59 | 『모정』의 애인을 한국전쟁에서 잃은

한수인 ?素音, Han Suyin

 

chapter 60 | 한국전쟁을 그린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피송 Pierre Fisson

 

chapter 61 | 한국 도자기를 사랑한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 Gregory Henderson

 

chapter 62 | 시조와 뜨개를 사랑한 신부

세실 리처드 러트 Cecil Richard Rutt

 

chapter 63 | 동아시아사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

 

chapter 64 | 사제출신으로 한국 화가와 결혼한 문학인

로저 오귀스트 르브리에 Roger Auguste Leverrier

 

chapter 65 | 한국전쟁을 쓴 유대인 랍비작가

하임 포톡 Chaim Potok

 

chapter 66 | 시인 김지하를 위해 투쟁한 정치학자

글렌 덜랜드 페이지 Glenn Durland Paige

 

chapter 67 | 한국에서 태어난 친한 소설가

가지야마 도시유키 梶山季之

 

chapter 68 | 한국을 수필로 사랑한

에드워드 포이트라스 Edward Poitras

 

chapter 69 | 한국에 함께 산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Jean-Marie Gustave le Clezio

 

chapter 70 | 금강산과 분단한국을 껴안은

테사 모리스-스즈키 Tessa Morris-Suzuki

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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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고 지음/와이겔리/2019년 10월/328쪽/18,000원

 

미국 여성 교사 작가_엘라수 캔터 와그너(Ellasue Canter Wagner)

유교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조선에서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었다. 이런 조선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서양인이 있었는데, 바로 한국 이름으로 ‘왕래(王來)’였던 엘라수 캔터 와그너였다. 와그너는 1904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에서 선교사이자 교육자로 활동했다. 그녀는 송도의 개성여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태화여자관과 여선교회에서 전도와 교육, 사회복지 일을 하며 우리나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1911년에는 『한국의 아동 생활』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와그너는 뛰어난 그림솜씨를 발휘하며 개화기의 우리 어린이들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냈다. 또 1931년에는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출간했다.

 

『한국의 어제와 오늘』(1931)은 1904년부터 1930년까지 벌어진 한국의 변화를 다루었는데, 한국의 전통과 역사, 자연환경, 의식주 등 일상생활과 가정생활의 변모를 비롯하여 옛것과 새것이 충돌하는 한국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와그너는 한국에서 여성의 지위가 달라진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제 많은 직업이 여성에게 열리고 있다. 최고의 가게들에서는 밝은 표정의 젊은 여자 직원이 유능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다. 여성 전화 교환수는 바로 도움을 준다. 서울 거리를 지나는 많은 버스의 안내원은 한국 여자다. 이들은 좀 건방지고, 자신이 새 한국의 현대적 산물임을 매우 의식한다. 병원에서는 최신식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고, 이들은 유능하고 아주 전문가답게 어려운 임무를 행한다. 그리하여 모든 계급에서 한국은 여성에게 문 여는 데 느리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95-96쪽)

 

신식 문물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다양한 직업이 생겨났는데, 많은 여성들이 전화 교환수, 버스 안내원 등 새로운 형태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또한 와그너는 아무래도 교육자였기 때문에 한국 부모들이 딸에 대한 교육열을 갖게 된 것에 주목했다. 당시 상류층 부모들은 딸은 서울의 여학교에 보내려 했다.

 

한편 이 책은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다양한 생각과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한국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에 병합되어 물질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쪽에는 일본 정부에 충성하고, 강력하고 번영하는 일본제국에 병합돼 물질적으로 큰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일본이 과거에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으나 이를 시정했다고 보고 개혁, 일본 의회 안에서 한국을 대변하는 것, 한국이 일본제국의 진정한 일부인 것을 바란다. 반면, 다른 이들은 영영 ‘조국을 잃었다’고 느끼고 한국이 민족이나 국가로서 미래의 희망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 정부나 일본 정부의 어떤 개혁 문제에도 관심 없고”, “완전한 국가적 독립만이 유일한 목표라고 마음을 굳혔다.” 어떤 이들은 아직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이룰 때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이들은 한국인들이 지배와 지도 면에서 먼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이들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자유를 얻고자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평화와 안락을 누리기보다는, 명예를 위해 차라리 이 나라가 전쟁, 혁명, 유혈사태로 고통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175쪽)

 

이 책에는 글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모습을 그린 컬러 그림이 여러 장 실려 있다. 이 그림들은 현대의 어린이 동화책들의 컬러 그림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데, 와그너 자신이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그림들을 보면 한국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예쁘고 즐겁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꽃지게 장수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림으로 쓴 영국 여성 여행작가_엘리자베스 키스 Elizabeth Keith

엘리자베스 키스를 ‘한국을 사랑한 작가’라고 하면 “그녀는 화가이지 작가는 아니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동양전통의 ’시서화일체(時書畵一體)‘를 생각해 보시라고 답하고 싶다. 동양의 선비들은 시와 문학과 회화를 하나로 보았다. 선비라면 세 가지를 모두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무엇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대상을 작품으로 담으면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키스의 책은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1946)라는 한 권만 있을 뿐이다. 이 책에 실린 39점의 그림은 우리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포착했다. 또한 이 책은 그림뿐만 아니라 저자가 한국에서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글들이 실려 있다. 저자는 한국인들의 삶의 모습을 정감 있고 따뜻하게 묘사했고,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게 한국인의 단점을 살짝 꼬집으면서 당시 한국인들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작품 속으로

키스는 미술에 천부적인 재능은 있었지만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 때문에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그녀가 창작욕을 불러일으키게 된 계기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키스는 1915년 언니 엘스펫과 형부 존 로버트슨 스콧의 초청으로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때, 서양과는 다른 동양의 독특하고 신비로운 색채와 미감에 매료되었다.

 

키스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8일이었다. 그녀는 6개월 정도 한국에 머무르며 곳곳을 다녔다. 그녀가 처음 본 한국의 모습은 비록 일본의 식민지로 핍박받고 있었지만 수려한 자연과 강인한 한국인이 있었다. 그녀가 무엇보다 주목한 것은 한국인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정신문화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한국 사람들의 성품이 나약하다고 폄훼했다. 세계인들은 그것이 마치 한국의 실상처럼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제대로 된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1936년까지 한국을 소재로 한 수채화, 목판화, 동판화, 드로잉 등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키스는 금강산 등 명승지와 평양의 대동문 같은 풍경이나 결혼식 등의 전통 풍속 그리고 일상을 분주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 등을 그림에 담았다. 또한 한국 어린이를 유독 사랑하여 1934년, 1936년, 1940년 세 차례에 걸쳐 자기 그림을 크리스마스실에 사용하게 하는 등 한국 어린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기도 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키스는 이렇게 적었다.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은 내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그린 수많은 그림들 중 수십 점을 선정한 것인데, 개중에는 아주 초기 작품에 속하는 것들도 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졌다. 전 세계가 이미 참혹한 일들을 많이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이미지의 작은 나라에 세상의 따뜻한 눈길이 머물 수 있도록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림들을 널리 보여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친절하게도 전통의상을 입고 모델을 서준 많은 한국인들 덕분에 나는 한국의 옛 모습을 돌아보며 잘 재현할 수 있었다. 어떤 그림들은 무척 짧은 시간 내에 스케치를 해야 했다. 예를 들면 지금은 고인이 된 김윤식 자작을 모델로 한 그림이 그런 경우인데 그는 궁정 예복을 입고 모델을 서 주었다. 김육신 자작은 당시 80세가 넘은 고령이었고 또 감옥에서 풀려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한국을 사랑한 엘리자베스 키스는 1920년부터 1940년까지의 한국과 한국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았다. 이 책에 실린 키스의 그림들은 수채화, 채색 목판화, 컬러 에칭, 스케치 등 기법 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특히 한국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과 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떤 작품에는 ‘기덕(奇德)’이란 한국식 예명을 써넣기도 하였다. 

 

한국 여자들은 뼈대가 작으며 얼굴 표정은 부드럽다. 인내와 복종이 제2의 천성이 된 듯하다. 하지만 온순하기만 한 한국 여자들에게도 의외로 완고한 구석이 있다. 가령 이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강요한다든지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의 생각이나 생활신조를 바꾸려 든다면, 차라리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허물어 옮기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상의 방법은 오직 한국 풍습을 존경하며 끈기와 친절로 대하는 것뿐이다.(74쪽)

 

“그들의 생각이나 생활신조를 바꾸려든다면, 차라리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허물어 옮기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는 문장에서 여느 소설가 못지않은 위트와 유머를 볼 수 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도 기개를 굽히지 않는 한국인의 자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인의 자질 중에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 나는 어느 화창한 봄날 일본 경찰이 남자 죄수들을 끌고 가는 행렬을 보았는데, 죄수들은 흑갈색의 옷에다 조개모양의 삐죽한 짚으로 된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6척 혹은 그 이상 되는 장신이었는데, 그 앞에 가는 일본 사람은 총칼을 차고 보기 흉한 독일식 모자에 번쩍이는 제복을 입은데다가 덩치도 왜소했다. 그들의 키는 한국 죄수들의 어깨에도 못 닿을 정도로 작았다.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153쪽) 

 

한국동화를 지은 독립운동가 _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한국명 석호필(石虎弼)은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을 보도하여 ‘3·1운동의 제34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사단법인)도 있고, 서울대학교는 매년 그를 기념하는 기념식과 학술강연을 실시하고 있다.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하여 수의과대학의 이장락교수가 쓴 『우리의 벗 스코필드』(1962)와 『한국 땅에 묻히리라』(1980) 같은 전기도 있고, 그것을 최진영 교수가 번역할 영문판 I Wish Buried in Korea(2016)도 나왔다. 그리고 기념강연선집 『다시 보는 스코필드』(2016)도 나왔다. 참으로 놀라운 투지력으로 독립운동을 돕고 한국인을 사랑하여 정부에 대하여도 쓴소리를 한 ‘호랑이’였다.

 

그런데 그는 한국을 주제로 하여 많은 글을 썼고, 그중에는 놀랍게도 서양의 어린이들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한 동화도 있다. 그는 1919년 영국의 아서 헨리 미(Arthur Henry Mee)에게 「Korea’s Fight for Freedom」(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이라는 동화를 써 보냈다. 이 글이 근년에 번역되어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본 프랭크 스코필드』(2016)라는 문집에 수록되었다.

 

나는 이 문집을 서울대학교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감동을 느끼는 동시에 평소의 궁금증이 풀렸다. 미국의 소설가 펄 벅은 1960년 11월에 서울에서 스코필드를 만나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스코필드 덕분에 자신의 소설 『살아 있는 갈대』에 수원 제암리 사건을 자세히 묘사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스코필드를 존경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 편지들을 2018년 9월에 미국 펄벅재단본부에서 보고 무척 놀라고 감동받았다. 역시 한국을 사랑한 이 두 문인은 서로 통했던 것이다.

 

작품 속으로

스코필드는 1919년 세계적인 아동 잡지를 발간하던 영국의 아서 헨리 미에게 「Korea’s Fight for Freedom」(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이라는 동화를 써서 보냈다. 이 동화의 첫 부분을 보자.

 

만일 내가 이 잡지를 읽는 나이가 많든 적든 모든 어린 학생들에게 지도에서 코리아를 찾아보라 한다면 과연 그들이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때로는 어른들까지도 한국을 중국의 한 부분으로 알고 있는 것을 볼 때 유감스럽게 느끼곤 했어요. 여러분은 모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래요.

 

먼저, 여러분에게 한국을 이렇게 소개하고 싶어요. 한국 땅은 하나의 큰 바윗덩어리 또는 비옥한 계곡들을 품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의 총체라고 하겠어요. 한국은 정확하게 만주의 남쪽에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마주 보며 동쪽으로는 무례한 듯이 일본에 등을 돌리고 있어요. 선생님이 반도의 한 예를 들으라고 물으시면 한국이라고 답하세요.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동해가 있고 서쪽으로는 보다 고요한 서해가 있지요. 자연이 왜 한국이 일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중국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신적 면에서 오늘날 이 땅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산과 계곡들이 지형적으로 갖고 있는 태도에 대해 이유를 말해 보고 싶어요.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여 한국의 고대역사로부터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이내 일본이 협정을 깨고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유를 강탈했다고 서술한다.

 

스코필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 왕이 느꼈던 공포, 매국노, 왕의 죽음, 비통한 국권침탈을 설명하고, 이어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선언에 근거한 한국의 독립선언을 서술한다. 저자는 특히 3.1운동과 제암리, 수촌리 학살사건에 대해 자신이 목격한 대로 매우 사실적으로 서술하였다. 스코필드는 일본의 압력으로 캐나다로 돌아갔다가 해방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살면서 때때로 신물 잡지에 한국인을 위한 글을 발표했다.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본 프랭크 스코필드』는 영문판인 Frank W.Schofeld as Remembered in Records and Memory도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166~179쪽에는 「Autobiography(자서전)」가 영문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1968년 8월 24일자라고 적힌 이 자료는 문학적 측면에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중요하니 반드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허심탄회한 고백과 증언은 눈여겨볼 만하다. 

 

문학으로 한국을 사랑한 인도 외교관_ 쿠마라 파드마나바 시바상카라 메논(K. P. S. Menon)

나는 2012년에 인도의 구자라트 법과대학에서 한 학기 가르쳤는데, 이듬해 그를 다시 연구하러 다시 한 번 뉴델리에 가서 며칠간 「메논문서」를 조사하였다. 돌아와 정리해서 낸 책이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2012)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크게 메논 덕분에 건국될 수 있었으며, 거기에는 이승만과 모윤숙을 통한 문학 사랑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정치와 외교가 막다른 골목에 서 있을 때 문학이 활로를 터주었다. 메논은 모윤숙을 통해서 춘원 이광수를 만났고, 그 자리에서 인도에 와서 한국의 문학과 역사를 가르쳐달라고 초청하였다. 춘원은 기꺼이 수락하였는데,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 중 납북되었다.

 

메논이 한국에서 활동하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담고 있는 자료가 있어 천만다행인데, 그것은 그의 연설들을 영어 원문과 함께 모윤숙 시인이 모아서 외국어대학교 정인섭 교수가 번역한 『메논박사연설집』(문화당, 1948)이다. 현재 국회도서관에 유일하게 한 권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메논박사의 연설집을 출판함에 즈음하여」라는 서문도 실려 있다. 대통령이 남의 책에 서문을 써준 경우는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이승만은 메논이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바로 알린 점, 한국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 가능한 지역 안에서 민족적 독립 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표명하였다고 칭찬한다.

 

메논은 한국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인물들과 접촉하였는데, 그는 한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것을 염려하며 자서전 『Many World Revisited』(많은 세계들 수정판)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정치적 생활은 한마디로 흥분되고 무질서했다. 400개 가까운 정당들이 있었는데, 정치적 원리에 거의 차별도 없는 것들이었다. 정치적 지도자들 사이에도 어느 날은 동지이다가 다음 날은 경쟁자나 원수가 되어 쓰라린 인격적 모함들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우에서 좌로 혹은 좌에서 우로 놀라온 경쾌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의 세 사람의 정치적 지도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었다. 그들은 모두 70대였고, 각각 조국을 위해 활동한 독특한 활동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는 극심한 개인적 반목들이 있었고, 내가 한국에서 떠난 직후 김구의 암살이 있었다. 김구는 청년 시절에 몇 가지 괄목할 만한 일을 하였다. 한국의 마지막 황후를 살해한 쓰치다 조스케 중위를 맨손으로 도살한 사람이다. 1932년 상하이의 한 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그 결과 일본인 사령관이 목숨을 잃고 일본인 제독이 한 눈을 잃고 일본인 장교가 한쪽 다리를 잃었다. 김규식은 다른 타입이었다. 학자적이고 명상적이며 더없이 박학하여 좌익도 우익도 아니고, 한국의 독립만도 아니라 통일도 가치를 주는 중도파 그룹의 지도자였다.

 

삼각관계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그의 이름은 남한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숭배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혐오되었다. 그의 나이, 학력, 사회적 매력, 닐슨 대통령과의 친분, 그리고 한국독립을 위하여 평생의 부단한 승리로 이끈 이승만은 네루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 같은 의미로 국민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네루는 문자 그대로 인도의 정치적 생활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렇지만 좌우익대립의 갑작스런 개입에 의해 이승만은 극단적 우익으로 전환되었다. 38선이 불길한 상징이었다. 외모로는 젠틀하면서 신념에선 경직된 이승만은 율리우스 시저가 자신에 대해 말한 것처럼 ‘북극성처럼 확고’한 인물이었다.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태도도 시저와 같았다. 그는 좌익과 자유주의자, 동반동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한 푼(quarter)도 주지 아니하였다. 그들과 상대하기 위하여 그는 남한에서 일종의 경찰국가를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북한에서 김일성이 반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취한 것과도 같았다. 남한에는 인신보호가 없었고, 영장 없는 구속을 인정하는 일본법률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었다. 많은 점에서 우리는 남한의 정부가 북한의 정부처럼 전체주의적임을 발견하였다.

 

메논은 “한국은 날아갈지도 모른다(Korea may blow up)”라고 예언했는데, 2년 후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그는 자서전에서 한국전쟁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초장에는 북한군이 곧장 남한을 휩쓸었고, 한국 전체가 그 아래 떨어질 것같이 보였다. 그리고 나서 맥아더의 눈부신 인천 상륙이 있었는데, 그 결과로 남한은 침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났다. 군사적 행동에 제동을 걸고 해결을 시도해볼 적절한 순간이었고, 인도는 이것이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승리에 취한 맥아더는 단지 침략자를 남한에서 퇴치하라는 유엔의 위임을 초과하여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중국이 만일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개입할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중국과 서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효과적 고리인 인도는 이 경고를 영국과 미국에게 매우 심각히 전달하였다. 그러나 서방 세력, 특히 미국은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이 으름장을 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북한에게 항복을 받으려는 계획으로 진군하였다. 처음에는 잘나갔다. 그의 군대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중국의 공격이 시작되어 맥아더의 군대를 38선 이남까지 격퇴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미국에는 분개의 소리가 나왔고, 미국은 원자탄을 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일어났다. 이러는 동안에 전쟁은 또 2년에 걸쳐 진행되는 결과가 되었고 극동에서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가능한 기회는 상실되었다.(269쪽)

 

한편 메논은 자서전에 모윤숙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인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그들 가운데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친애한 사람은 마리온 모(모윤숙)이라는 한국의 지도적 여류시인이었다. 나는 그녀와 많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정치 얘기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치에 관하여는 그녀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동의했고, 대신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슬픔과 기쁨 등 일상적 사항들에 관하여 담론했다.

 

모윤숙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의 태도는 상당히 단순했다. 그녀에게는 남한이 한국이었고, 북한은 아데나워에게 동독처럼 하나의 저주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한에 주권공화국을 세우려 투표하는 것은 나라 전체의 독립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배반이었다. 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몇 개의 시도 읊어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일 나의 나라가 유엔 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나의 행위-혹은 비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한다. 인도는 재빨리 자신을 챙겨, 미국 안에 동의 투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북쪽의 인민공화국보다 더 승인해주기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인도는 한국의 부자연스런 분단을 영구고착화시킬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는 미소 양 진영 사이에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는 데에 지체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3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1953년 중반에 평화가 확보된 것은 대부분 인도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나는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평화를 위해 애쓴 메논은 인도로 귀국한 후에도 모윤숙과 편지를 교환했는데, 두 사람은 1972년에 뉴델리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대한민국의 건국사에는 이렇게 문학이 점철되고 있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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